![]() | ![]() | |
↑↑ 본지 편집국장 | ||
ⓒ 양산시민신문 |
#장면 둘 만 13세 2개월인 지적장애아에게 숙박을 대가로 다수 남성이 차례로 성관계를 하고 달아난 사건을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성폭력이 아닌 성매매로 판결했다. 남성들이 지적장애아에게 숙박을 제공하고, 성관계 후 떡볶이를 사준 것을 성매매 대가로 판단한 것이다.
#장면 셋 한 방송에서 이른바 ‘강아지 공장’이라는 불법사육장 실태를 고발했다. 평생 새끼만 낳는 어미개들은 좁은 공간에 갇혀 강제임신에 불법수술을 반복하다 더 이상 새끼를 낳지 못하면 처참하게 버려지기 일쑤였다.
방송이나 광고에서 흔히 ‘3B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미인(Beauty), 아이(Baby), 동물(Beast)을 기용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이 법칙이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는 약자에 대한 사람들의 호의에서 비롯한다. 특히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보호본능’을 자극하기에 가장 적합한 요소다.
최근 우리 사회를 분노케 한 장면을 나열해놓고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가진 양면성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3B 법칙이 결국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조건’이다. 여성은 아름다워야 하고, 아이는 귀여워야 하고, 동물은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조건. 밖으로는 약자에 대한 보살핌을 이야기하면서 그 보살핌 범주에 조건이 따라 붙는다. 다수가 소수를 대하는 방식이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인 이유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남성중심적 구조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약자다. 아이들은 언제나 양육 대상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적 약자가 된 것은 스스로 결정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다수가 결정한 사회제도 탓에 소수이자 사회적 약자가 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나와 같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 존재지만 정치ㆍ사회ㆍ경제적 불평등 탓에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일의 출발점이다.
근대 이후 각 나라마다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자리매김한 의사결정방법이 있다. 바로 ‘다수결 원칙’이다. 가장 이상적 방법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일치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수결 원칙은 소수 판단보다는 다수 판단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다수결 원칙을 민주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사결정방법으로 선택한 배경은 인간 누구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는 전제를 밑바탕에 두고 있다. 일부 사람들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이 바로 다수결 원칙을 민주사회 의사결정방법으로 선택한 이유다.
그리고 다수결 원칙에는 올바른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수를 위한 소수가 아니라 소수를 위한 다수가 돼야 한다는 신념도 반영돼 있다. 정치ㆍ사회ㆍ경제적으로 더 많은 자원과 권력을 가진 다수가 불평등한 소수를 위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사회 전체 행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판단까지도 가능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 당장 손해일지 모르지만 전체 사회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복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다.
불행히도 다수결 원칙이 가진 정신과 달리 우리 사회 다수는 소수를 위한 결정에 인색하다. 오히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더 길들여져 있다. 한발 더 나가 사회적 약자인 소수를 다수가 공격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더 이상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는 말을 꺼내기 힘들 지경이다.
앞서 우리를 분노케 한 사례 모두 소수를 대하는 우리 사회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이라는 이유로, 동물이라는 이유로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들. 여성은 아름다워야 하고, 동물은 사랑스러워야 하며, 아이는 귀여워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며 소수에게 동등하기 위한 조건을 다수가 강요하는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사회는 정말 적은 수의 사람이 더 많은 정치ㆍ사회ㆍ경제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우리 사회 다수로 행세하고 있다. 반면 불평등한 소수는 수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을 다수로 착각하며 또 다른 소수를 외면하고 심지어 공격하고 있다. ‘소수를 위한 다수’라는 말의 의미마저 헷갈리는 씁쓸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