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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희 본지 편집국장 | ||
ⓒ 양산시민신문 |
선생은 그들에게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이 어딨노. 작가라면 낱낱이 찾아서 이름을 붙여줘야지”라며 젊은 작가들이 ‘이름 없는 들꽃’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선생답게 그는 손수 우리말 사전과 식물도감을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의미를 담고 있다.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시인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의미 없는 몸짓에 불과한 존재가 이름을 얻었을 때 비로소 ‘꽃’이라는 의미로 다가서게 됐다는 뜻이다.
세상에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이 걸어온 길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을 우리는 민초(民草)라고 불렀고, 민중(民衆)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탐탁한 표현은 아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그들 모두 각자 이름으로 역사의 흐름 속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8월 15일, 다시 광복절을 맞이한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딛고 나라를 되찾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반면 그 희생을 발판 삼아 자신의 이익을 챙겨온 사람들도 있었다.
광복 71주년을 맞이한 오늘, 그들의 선택에 걸맞은 이름을 얻고 있는가를 돌이켜보면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는 부끄러움이 고개를 치켜든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친일파 후손은 사회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는 뉴스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들 분노하면서도 정작 그들에게 걸맞은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일에 인색한 탓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지역 뜻있는 사람들이 지역 독립운동가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기 위한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를 지난 6월 발족했다. 그리고 지난 11일에는 사업회 첫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선양사업과 관련해 선생에 대한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가 열렸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다.
양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생가는 공업지역에 둘러싸여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잊혀 ‘이름 모를 영웅’으로 남을 뻔한 윤현진 선생을 오늘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비단 윤현진 선생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이번 계기를 통해 이름을 얻고 기억되길 바란다. 자랑스러운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길 바란다.
그리고 또 하나 부끄럽지만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닐지 모르지만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지난해 12월 28일,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간 한국 여성들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과 내각 총리의 사죄 표명 후 10억엔 규모의 일본 정부 예산을 출연하는 재단 설립을 합의했다. 그 결과 지난달 28일 화해ㆍ치유재단이 설립됐다.
그리고 광복절을 사흘 앞둔 12일,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국내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일본 정부 예산 10억엔을 화해ㆍ치유재단(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재단)에 신속하게 출연하고 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합의 이후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은 명확한 일본의 인정과 사죄가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돈으로만 보상하겠다는 식이라며 합의 자체에 반발하고 있다. 위안부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해온 일본 정부의 역사적 인식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할머니들의 생각이다. 피해자가 인정하지 않는 화해와 치유는 그들에게 합당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일이다. 그저 ‘이름 모를 들꽃’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사실을 외면하려는 태도다.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합의한 재단 이름은 화해와 치유다. 반면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민이 뜻을 모아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재단 이름은 정의와 기억이다.
화해와 치유, 정의와 기억. 모두 역사에 필요한 이름이다. 하지만 무엇이 먼저 이뤄져야 하고, 무엇에 가치를 둬야 하는가에 놓고 여론이 분분하다. 분명한 사실은 모른다고, 외면한다고 해서 진실마저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부끄러운 역사도 그에 걸맞은 이름을 가져야 하고, 기억돼야 한다.
역사의 기록에서 ‘이름 모를 들꽃’과 같은 표현이 당연하게 사용돼서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