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정부를 지켜보는 시민은 더 이상 큰 지진은 없을 것이라는 발표도, 지진이 원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믿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지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이 커지고 있다. 지진과 같은 재난은 지자체가 아닌 정부 몫이라는 변명은 구차할 뿐이다.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 지진이 발생한 12일, 양산시는 비상근무체제로 들어갔다. 양산시 지진 대비 표준매뉴얼에 따르면 지진 규모에 따라 모두 3단계 대응을 하도록 돼 있다.
매뉴얼을 살펴보면 재난안전대책본부 구성과 역할에 대한 내용은 자세하게 나와 있지만 지진 발생 이후 시민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재난본부는 이를 어떻게 전파하고, 확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매뉴얼만 보면 재난본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해 상황을 집계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매뉴얼이 부실하다 보니 실제 지진 발생일 양산시는 시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직실이나 상황실로 걸려오는 시민 전화에 “안전하게 대피하라”는 말 외에 딱히 해줄 말도 없었다.
여기에 부실한 매뉴얼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훈련 부족과 안전불감증이 겹쳤다. 양산시가 비상근무체제로 들어갈 경우 부서별로 비상근무자 2명을 소집해 정해진 위치에서 비상근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부서 근무자들은 비상소집에도 불구하고 위치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고, 이를 지휘해야 할 상황실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파악조차 하지 못했고, 취재를 시작하자 확인해 조치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상황실에서 비상근무체제로 들어간 후 양산시의회에 이 같은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아 일부 시의원만 참여하는 등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번 지진에서 정부뿐만 아니라 양산시 역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나라 재난대책이 수해 중심으로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태풍이나 집중호우에 대비한 재난대책은 오랜 세월 훈련됐지만 수해와 성격이 전혀 다른 지진에 대해서는 대비가 부족한 탓이다.
기상예보에 따라 단계별로 준비과정을 거치는 수해 대책과 달리 예보 없이 갑작스레 발생하는 지진은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지진 대비 매뉴얼은 이 같은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 수해 대비 중심에서 벗어나 지진이라는 재난 특성을 이해하고 반영하는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재난본부 설치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매뉴얼이 아니라 실제 시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상 속 대응책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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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시민신문 |
일본은 이미 세심한 상황별 대응 매뉴얼과 안전교육을 통해 지진이 발생했을 때 개인 목숨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시민에게 알리고 있다.
예를 들어 곧 다가올 삽량문화축전을 떠올려 보자. 수만명 시민이 몰릴 축전에서 지진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현재 양산시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다. 결국 시간대별ㆍ상황별 대처 방안을 미리 고민하고 세밀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이번 지진 때도 아파트ㆍ마을별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방송이 나오긴 했지만 정작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안전한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못했다. 지역별 맞춤형 매뉴얼이 필요한 이유다.
지진 이후 정부와 지자체, 관련 기관마다 지진 안전을 보장하는 대책을 강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양산시 역시 최근 실시 중인 내년 주요업무보고 자리에서 지진 대비 대응 대책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시에 따르면 지진 발생 시 행동 매뉴얼을 세밀화해 기존 행동 매뉴얼을 강화하고, 지진 전문가 강의로 지진에 대한 이해와 대피 요령을 습득하는 한편, 시민이 실제 대피훈련을 시행해 행동 요령을 익힐 수 있도록 하는 등 후속조치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지진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양산시에서 마을앰프를 통한 재난상황을 일괄방송할 수 있는 디지털 방송시스템을 내년까지 조기 완료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경남도와 도교육청 역시 시민과 학생 안전을 위한 지진 대비 특별대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문제는 해당 기관들이 쏟아내는 대책에 기관 간 업무협조가 유기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 12일 지진 발생 후 안전한 장소를 찾아 학교 운동장으로 간 시민은 일부 학교 정문이 잠겨 있는 황당한 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양산시와 교육청, 일선 학교 간 업무 협조가 사전에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책 발표에도 의구심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관별로 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관련한 다른 기관과 업무 협조를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탓이다.
결국 양산시가 중심이 돼 지역 내 유관기관이 지진 발생 시 공동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공유해 신속한 대책 시행이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또 다른 과제인 셈이다.
이밖에도 ‘사람’ 중심 후속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이번 지진 후 양산지역에서 눈에 띄는 인적ㆍ물적 피해는 다행히 없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지진으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시민이 많다. 특히 어린아이들 경우 지진으로 인해 일종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증상을 보이며 “이민 가자”, “1층으로 이사 가요”라는 등 불안감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이미 지자체에서 지진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을 호소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심리치료와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일을 위한 재난 대책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장면인 셈이다.
결국 지진으로 무너진 정부와 지자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말의 잔치’가 아니라 시민을 위한 구체적인 매뉴얼과 사람을 위한 대책 수립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