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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희 본지 편집국장 | ||
ⓒ 양산시민신문 |
지난 4일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의혹과 관련해 국민 앞에 두 번째로 고개 숙였다.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후 대통령 사과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된 내용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라는 말이었다. 대통령 사과가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과 함께 이 말은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며 대통령을 조롱하는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말과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대통령이 머리 숙여 사과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이 말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먼저 대통령은 스스로 자괴감이 드는 이유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이 최순실 의혹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국가원수로 국가시스템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 대통령이 스스로 비선에 의한 국정운영을 일삼아 왔다는 점이다. 두 차례 사과에서 대통령 스스로 최순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일부 시인하고서도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라며 본질을 흐리고 있다.
대통령 사과가 진정성을 가지려면 왜 “사사로운 인연”을 국정운영 중심에 놓고 있었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추었던 것이 사실”이라는 변명은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해명이 아니다.
하위공무원조차 사사로운 인연을 공무에 반영하면 큰 징계를 받는 상황에서 행정부를 이끄는 최고공직자인 대통령이 사사로운 인연을 국정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막무가내로 이해해달라는 사과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음으로 “대통령을 했나”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말꼬리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국민담화’라는 중요한 형식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는 한 글자 한 글자가 허투루 받아들일 수 없다. 대통령이 담화문을 직접 작성했든 주변 참모(?) 도움을 받았든 말과 글은 생각을 담게 마련이다.
대통령은 본인이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민주적 사고를 가진 대통령이라면 사과 하는 자리에서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는 표현을 쓸 수 없다. 쏟아지는 의혹 속에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다고 백번 양보해 이해하려 해도 “이러려고 대통령으로 선출해 주셨나”가 민주적 사고를 담은 표현이다. 원치 않았는데 억지로 대통령이란 무거운 자리를 떠넘긴 국민은 없을 뿐더러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책임을 맡긴 국민 또한 없다.
프랑스 절대왕정을 확립한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국가의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국가는 존재만으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민주사회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특정개인이 아니라 공적시스템으로 운영될 때 국가로서 의미를 가진다.
대통령 담화 가운데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는 표현에서 민주사회 국가가 아닌 “짐이 곧 국가”라는 절대왕정 국가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매일 밤 전국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수많은 촛불은 어두운 그림자를 쫓아내기 위한 국민의 열망을 담고 있다. 대통령 사과를 조롱하며 기발한 패러디로 응수하는 이들 역시 생각을 담는 말과 글의 의미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 제69조에 나와 있는 대통령 선서 내용이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2013년 임기를 시작하며 이 같은 내용을 국민 앞에 선서했다.
헌법은 국민이 가진 주권을 대통령에 위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책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국민에게 허락받지 않은 채 권력을 위임한 대통령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사사로운 인연’에 따른 실수라고 말하는 대통령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이미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한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국민이 말하고 있다.
대통령은 담화에서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있고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여러 현안이 산적해있는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선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히 계속되어야만 합니다”라고도 했다.
여기에 국민은 말하고 있다. 더 이상 대통령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대통령은 물러나 있으라고.
대통령 임기는 국민이 정해준 기한까지 끝이고, 대한민국 미래는 주권자인 국민 스스로 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국민은 권위 잃은 통치를 유지하길 원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말하는 국정혼란은 혼란 당사자인 대통령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 수습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혹시 “대통령이 곧 국가”라는 착각에 빠져 상황을 수습하겠다는 서툰 시도는 더 큰 국민저항을 부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