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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서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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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사람들

이현희 기자 newslee@ysnews.co.kr 입력 2017/01/24 09:24 수정 2017.01.24 09:24
마음을 감추는 일이 미덕인 사회
사람 앞에서 서툴기만 한 어른들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일에는
거리를 좁히는 연습이 필요하다













 
↑↑ 이현희
본지 편집국장
ⓒ 양산시민신문 
설을 앞두고 은행에 들렸다. 집안 어른들과 조카들에게 줄 세뱃돈을 깨끗한 새돈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나름 명절 기분 내려 예쁜 봉투도 준비했다. 봉투 속에 돈을 넣으며 문득 “내가 참 서툰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서툴게 변하는 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명절이면 오랜 만에 보는 친척들에게 재롱을 부리거나 입을 맞추며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해 한해 나이가 들면서 주변 사람에게 애정과 호감을 표시하는 일이 쑥스럽게 여겨진 것이 언제부턴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어느 순간부터 정성이 담긴 선물을 고민하기보다 돈봉투를 준비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때론 쓸모없을지 모를 선물보다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돈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일이 실용적이라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때론 무심하게 습관처럼 세뱃돈을 준비하며 은행 잔고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사람 앞에서 서툴기 만한 것은 비단 나이 탓은 아니다. 우리 사회 미덕 가운데 하나가 표현을 감추고 마음을 감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이 눈물을 보이는 일은 차라리 금기에 가까운지 모른다. 굳이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는 괜한 자부심(?)을 내세우며 오히려 표현하지 않는 일이 당연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다. 1년에 한 두번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이 이웃보다 어색한 지경이 되면 다가오는 명절은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시기다. 
 
가끔 외국여행을 가면 서양권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 반, 부러움 반으로 그들을 훔쳐보곤 한다. 부부나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가족에게 끊임없이 사랑한다 속삭이며 스킨십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낯선 곳에 떨어진 동양인 남자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 역시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의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어렵사리 용기를 내 그들을 따라 해보려 해도 이내 쑥스러움은 우리 몫이 되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지 못한 감정표현을 갑자기 흉내 내려다보니 벌어진 일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야 요즘 우리 젊은 세대가 하는 감정표현 역시 외국사람들 못지않게 민망한 모습으로 여길 지 모른다. 길거리에서 부둥켜안은 채 서로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젊은 연인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어르신에게 감정표현은 곧 ‘공중도덕도 모르는’ 철없는 짓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 둘 나이 들어간다.

곧 중학생이 되는 조카에게 입학선물을 해줄 생각으로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조카는 쭈뼛거리며 몸을 배배 꼬다 어렵사리 “책가방 사주세요”라는 말을 꺼냈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라고 돈으로 줄까 고민하다 조카가 필요한 것이 무언지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거라 물어본 것인데 “돈으로 주세요”라는 답으로 돌아오지 않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요즘 중학생이 좋아하는 스타일 가방이 무언지도 물어보기도 하고, 중학생이 되는 기분이 어떤지 대화를 이어갔다. 1년에 몇 번 보지 않는 외삼촌이 편할 리 없는 조카는 내 질문에 길게 답하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보니 훨씬 편하게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며칠 후 조카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원하는 가방을 찾아 사진으로 보내라는 말에 갖고 싶은 가방을 찾아 보낸 것이다. 또다시 며칠 후 가방을 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도착했다. 그리고 하트를 그리고 있는 이모티콘도 함께….

사실 그동안 친절한 외삼촌이지 못한 탓에 조카들과 늘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주 보지 못해 조카들이 나를 낯설어 한다고만 생각했지 내가 거리를 좁혀보려 노력하지 않았다. 지난해 이맘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내 서툼을 돌아보게 됐다. 스스로 먼저 다가가지 못한 채 주변을 서성이는 모습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서툰 모습으로 서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서로에게 서툰 사람들이다. 관심과 애정을 무뚝뚝함으로 포장하면서도 자신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서툰 사람들이다. 나이 들어가며 감정을 숨기는 일이 더 잦아질수록 사람 앞에 서는 일이 더 서툴기만 하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말을 건네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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