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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희 본지 편집국장 | ||
ⓒ 양산시민신문 |
지난 2013년 4월에 실시한 양산시의원 보궐선거(중앙ㆍ삼성)에서 집계된 투표율이다. 가장 최근 실시한 보궐선거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다. 유권자 10명 가운데 8명이 주권 행사를 포기한 셈이다. 투표율 하락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때문에 선거 때마다 투표율은 당락을 좌우하는 주요변수로 거론되곤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다. 자신을 대리하는 대표자를 선출하고, 그로 하여금 정책과 각종 사업을 결정하고 집행하게 한다. 하지만 유권자 10명 가운데 2명이 선택한 대표자가 과연 전체 유권자 생각을 대변할 수 있을까? 떨어지는 투표율은 점점 우리가 어렵게 지켜온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유권자가 권리를 포기하는 현상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정치 혐오, 경쟁적인 일상, 무관심, 개인주의…. 수많은 분석이 선거 때마다 낮은 투표율을 설명하는 말로 등장하곤 한다.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불리는 선거에서 유권자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는 일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이끌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금 너무 익숙한 투표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민주주의 기원을 고대 아테네에서 찾는다. 아테네 시민이 광장에 모여 직접 대표자를 선출하고, 정책 토론을 펼친 끝에 결론을 내는 과정을 민주주의 모태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자유롭게 토론과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오로지 아테네 시민권을 가진 남성에게만 허락됐다는 점이다. 여성과 노예는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한 것 역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근대 민주주의 시작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남여가 동등하게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실제 법률상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 것은 1세기 반 만인 1946년에야 이뤄진다.
다른 나라 역사를 둘러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 역시 자신을 대신할 대표자를 직접 선출하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1948년 헌법 제정과 초대 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한 5.10 총선거에서 우리는 모든 유권자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했다. 서구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랜 세월 불평등하게 인정했던 투표권을 모든 유권자에게 동등한 권리로 인정한 것은 우리 민주주의가 늦은 만큼 성숙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곧 우리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쳤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통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권리를 박탈했다. 이후 1987년에 와서야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경험한 것과 같이 정치적으로도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춰왔다. 이 과정에서 한 영국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피길 기다리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며 우리 민주주의를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탄핵 정국에서 우리 국민이 보여준 촛불집회를 바라본 외국 사람들은 경이로운 시각으로 우리 민주주의를 달리 보고 있다. 촛불집회에서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과 질서, 무엇보다 합법적인 권리 회복 과정은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자신하던 그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우리 스스로 성취한 결과는 자랑할 만하다. 많은 이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외쳤다. 하지만 정작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 영역은 관심 밖에 일처럼 여기곤 한다. 오히려 우리 삶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역 일꾼을 뽑는 일은 사소하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다.
곧 다가오는 대선 이슈에 보궐선거와 관련한 소식을 듣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 민주주의가 허약한 이유는 가장 기초인 지방자치가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한 탓이 크다. 대선 만큼 우리가 보궐선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일상에서 출발하고, 그 출발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바로 지방자치에서 훈련을 거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