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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철없는 남편의 여름밤
오피니언

철없는 남편의 여름밤

이현희 기자 newslee@ysnews.co.kr 입력 2017/07/18 09:04 수정 2017.07.18 09:04
에어컨이 가져다 준 새로운 여름
전기요금 걱정하는 평범한 일상 속
미래 지불해야 할 또 다른 고지서
환경, 안전을 떠올리는 여름밤













 
↑↑ 이현희
본지 편집국장
ⓒ 양산시민신문 
“돈이 좋구나!”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한 후 요즘 들어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결혼 후 큰마음 먹고 집을 사고 여름마다 우린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았다. 베란다 창문과 현관문을 열어놓으면 맞바람이 불어 여름 내내 더운 줄 모르고 살았다. 



더욱이 아파트 꼭대기 층이라 사람들이 다니는 일도 없어 굳이 에어컨을 사야겠다는 욕심이 나질 않았다. 선풍기만으로도 충분히 여름 더위를 견뎌낼 만큼 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하루 이틀 정도 아내가 사용하던 작은 용량의 벽걸이 에어컨을 틀며 열대야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지지난해부터 견디지 못할 정도로 무더운 날이 하루하루 늘어가더니 지난해에는 벽걸이 에어컨으로도 감당하기 하기 어려워졌다. 몇 시간을 틀어봐야 거실은커녕 에어컨 바로 앞만 그나마 시원해질 뿐이었다. 열대야가 계속되던 여름날, 에어컨 바람 바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잠을 청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뉴스에서 올해 여름은 더 길고 덥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내는 에어컨을 새로 장만해야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득이나 미세먼지를 걱정하던 차에 더 이상 문을 열고놓고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곧 에어컨을 사서 집 한 쪽에 들여다 놨다. 봄이 가고 여름이 찾아온 후 처음 에어컨을 틀어보니 신세계가 찾아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집 전체가 시원해지더니 몇 십분 지나자 추위마저 느껴졌다. 온도를 그렇게 낮게 설정한 것도 아닌데 새 에어컨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여름을 선물해줬다. 에어컨을 틀 때마다 “돈이 좋구나”라며 감탄하는 아내를 볼 때면 큰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살았던 것 아닌지 돌이켜보곤 한다. 


내가 에어컨이 선사한 새로운 여름을 만끽하는 동안 돈이 좋다던 아내는 무언가 다시 골똘히 생각하는 일이 종종 있다. 에어컨 설명서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시계를 쳐다보기도 한다. 더위와 미세먼지 걱정 끝에 들여다 놓은 에어컨이 이제 전기요금 걱정으로 이어졌다. 어디서 들었는지 전기요금 폭탄을 맞았다는 주변 이야기를 꺼내며 언제부터 에어컨을 틀었는지 되묻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또 다시 ‘걱정인형’이 돼 버린 아내에게 에어컨을 끌어안고 살 거냐며 핀잔을 주다 짐짓 가진 건 돈 밖에 없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여름날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시민 일상이다.


아내가 현실적으로 전기요금을 걱정하는 동안 철없는 남편이란 작자는 직업병처럼 뜬금없는 생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양산지역에 우뚝 솟아있는 송전탑 문제를 보도했던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다. 특히 학교와 보육기관 바로 옆에 있는 고압송전탑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던 보도가 머릿속을 맴돈다. 


아무 의심 없이 에어컨이 선물한 새로운 여름을 즐기면서도 문득 머릿속에서는 에너지가 우리 삶에 미치는 복잡한 영향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걱정하는 전기요금 따위는 핀잔으로 대신하면서도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원전 문제를 어떻게 보도해야 할 지 고민한다. 고질병이다. 


어떻게 보면 에너지 문제는 우리가 여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선택하는 일인지 모른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전기요금 걱정을 하지 않은 채 살다 더위 걱정을 덜자 다시 전기요금 걱정을 하는 아내처럼 말이다. 에너지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하고 대신 편리를 얻는 일이다. 그 비용에는 단지 돈뿐만 아니라 우리 안전도 포함돼 있다. 양산 어느 곳을 가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즐비한 송전탑 역시 우리가 편리를 선택한 대가다. 

 
당장 다음 달 날아들 전기요금 고지서를 걱정하는 일과 오랜 시간 지나서 우리에게 찾아올 환경파괴와 전자파 그리고 원전 불안정성 등과 같은 위험을 걱정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 다만 시차가 있을 뿐이고, 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불확실한 믿음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몇 번이고 에어컨 설명서를 들여다보며 다음 달 나올 전기요금을 계산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철없는 남편이 고작 떠올리는 여름밤의 망상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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