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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베일에 가려져 있던 양산 고대사를 재조명하다”..
기획/특집

“베일에 가려져 있던 양산 고대사를 재조명하다”

김민희 기자 minheek@ysnews.co.kr 입력 2017/08/29 09:17 수정 2017.08.29 09:17
[양산 고대사 정립과 가야문화 연구를 위한 학술 토론회]

양산 5~6세기경까지 가야였다는 시각과
3세기부터 신라였다는 상반된 주장

물금과 인근 광산 출토 철제품을 조사해
지구화학적으로 분석해보자는 의견도

문재인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로 ‘가야문화 연구ㆍ복원사업’을 포함했다. 이에 가야 문화권이라고 여겨지는 영남과 전남지역 자치단체에서는 가야사 개발과 복원을 위해 노력을 쏟고 있다. 양산시도 가야 문화 발굴을 위한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양산지역은 가야 문화권에 포함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지역으로, 학계 연구가 필요한 지역이다. 이에 양산시와 양산문화원, 윤영석ㆍ서형수 국회의원 주최, 본지 주관, 양산시의회와 양산교육지원청, 양산시립박물관,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 후원으로 지난 23일 양산 고대사 정립과 가야문화 연구를 위한 학술 토론회 ‘양산에서 가야의 숨결을 찾다’가 양산문화원 공연장에서 열렸다. 이날 내외빈과 시민 300여명이 토론회를 찾아 양산 고대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접했다.
 













ⓒ 양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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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고대사 정립과 가야문화 연구를 위한 학술 토론회는 ‘양산에서 가야의 숨결을 찾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날 백승옥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조수현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장, 강봉원 경주대학교 고고미술인류학과 교수, 박맹언 부경대학교 지구환경과학과 교수가 각각 주제 발표를 하고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 진행으로 패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가야사를 인문학적으로 파헤침은 물론, 과학적인 시각으로도 분석해 양산지역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번 토론회를 공동 주최한 이들을 대표해 박정수 양산문화원장은 “양산은 신라와 가야 접경 지역이라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신라사 복원 정책에도 끼지 못했다”며 “금관가야 중심인 김해와 접경지역인 양산은 신라와 가야 영향을 동시에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5세기 이전 고대사 연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막연한 추측만으로 가야사 복원에 동참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원장은 “이제 고대사 복원과 연구는 더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됐고, 베일에 가려졌던 양산 고대사를 정립한다는 것은 양산시가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분명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토론회를 통해 가려졌던 양산 고대사 복원은 물론, 가야에 관한 명확한 연관성도 찾을 수 있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가야와 고대 양산
- 백승옥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백승옥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가야와 고대 양산’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양산이 5~6세기 신라에 편입되기 전 가야국 가운데 작은 나라인 ‘삽라(歃羅)’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백 실장은 “신라는 일반적으로 정복한 땅에 주군을 설치하면서 그 초명은 대부분 원래 그 지역명 또는 국명을 사용했다”며 “삽량주(歃良州) 경우도 마찬가지로, 삽량이라는 지명 혹은 국명을 가진 나라가 있었는데 신라가 주를 설치하면서 그 이전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백 실장은 “량(良)은 라(羅)와 통하는 어미로, 이를 가진 것은 대부분 나라 이름”이라며 “북정동고분군 등 고고학적 양상을 고려해 볼 때 신라에 편입하기 전 고대 양산지역에 나라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이름을 삽라로 추정해 본다”고 덧붙였다.

















↑↑ 양산은 신라에 편입되기 전
5~6세기 가야국 가운데 작은 나라인
‘삽라’ 였을 것

백승옥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양산시민신문

또 삽라 존재 시기를 5~6세기로 추정한 것에 대해서는 부산과 경남 창녕지역 등 낙동강 동안 지역 복속 시기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사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간접적인 사료이지만, 양산지역이 신라 영역으로 되는 시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산 복천동고분군 문화적 양상이 5세기 중엽이 되면 신라화 된다는 설은 물론, 일본으로부터 역수입된 단갑(삼국시대 갑옷) 분포를 통해 낙동강 동안에 있는 지역이 신라 세력 아래에 들어가는 시기를 5세기 말엽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5세기 초(417년) 제상이 삽량주 간이나 태수가 됐다’는 기록을 토대로 하면, 주(州) 설치는 6세기 초 지증왕 시기이며 삽량주는 문무왕5년(655년)이기 때문에 그 시기 양산은 신라 영역으로 볼 수 없다고도 했다.


백 실장은 “학계 논의를 바탕으로 고대 양산지역 신라 편입 시기를 생각해보면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 어느 시기로 추정한다”며 “앞으로 ‘가야 삽라국’에 대한 구체적 모습을 찾아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고 자료로 본 양산지역의 가야문화
- 조수현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 원장


조수현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장도 10년 전부터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다수 가야 유적을 발견해 양산이 가야 문화권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 원장은 ‘고고 자료로 본 양산지역의 가야문화’라는 발표를 통해 “기존 학계에서는 양산지역 고대사를 이미 신라 문화권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하지만 최근 발굴 조사 자료에서 5세기 이전 다수 가야 유적과 유물 등 고고 자료가 나오면서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양산지역도 가야 문화권이라는 인식 전환 계기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조 원장은 소토리고분군, 삼삼리고분군, 호계ㆍ산막동 유적, 명동 유적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부산 복천동고분군, 김해 대성동고분군 등에서 확인되는 유물조합상으로 구성돼 금관가야 토기 문화권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 기존 학계 인식과 다르게
가야 유적과 유물 출토로
양산이 가야 문화권이라는 인식 생겨
꾸준한 학술조사와 대책 필요

조수현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 원장
ⓒ 양산시민신문

조 원장은 “신라 토기 문화를 수용한 금관가야지역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신라 토기 모티브만 수용하고 가야 토기 제작 기법을 유지해 지역색이 강한 토기를 생산했다”며 “신라 문화권으로 수용된 이후에도 기존 가야 문화가 일정 기간 유지된 것으로 생각하며, 양산지역은 고고 자료로 봤을 때 적어도 5세기 이전까지는 김해, 기장, 부산과 함께 금관가야 문화권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5세기 이전 양산지역은 지형적으로 낙동강에 인접해 있어 경주 ‘사로국’보다 김해 ‘구야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연맹 소국으로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조 원장은 앞으로 이뤄질 가야사 연구 방향에 대한 제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가야사 관련 문헌과 고고 자료를 전수조사해 학술자료를 발간해야 하고 양산지역 중요 유적지에 대한 학술 발굴 조사와 정비계획에 대한 기획, 물금 철광산 유적에 대한 학술조사와 관광자원 활용방안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또 조 원장은 “가야사 관련 유적에 대한 보존 대책과 정비, 역사성이 있는 관광자원 활용을 위한 실시계획을 마련하고 지역언론과 SNS 등으로 적극적인 홍보를 펼쳐야 한다”며 “시민을 대상으로 연속적인 지역사와 문화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양산 북정리 및 신기리 고분 :
양산지역의 정치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 강봉원 경주대 고고미술인류학과 교수


앞선 주장과는 달리 강봉원 경주대 교수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양산이 이미 3세기에 신라에 편입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강 교수는 이를 역사자료와 북정동ㆍ신기리고분군 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설명했다.

















↑↑ 삼국사기 기록을 봤을 때
양산은 3세기 무렵부터 신라에 속했을 것
북정동ㆍ 신기동고분군 봐도
신라문화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습

강봉원 경주대 고고미술인류학과 교수
ⓒ 양산시민신문



강 교수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지마이사금 4년(115년) 신라가 (금관)가야를 공격하기 위해 황산하(지금의 물금지역 주변)를 지나가는 데 가야 복병이 숲속에 매복하고 있었다’는 기록과 그 맥락으로 파악했을 때 3세기 초까지는 양산이 신라 영역은 아니었으며 당시 황산이 가야제국 가운데 하나였거나 최소한 가야 영향 아래에 있었던 곳이었을 것”이라며 “신라 미추왕 3년(264년) 3월 ‘왕이 황산을 둘러봤다’는 기록에 근거해 3세기에는 양산이 이미 신라에 편입된 상황으로 추정한다. 또 삽량주간 박제상의 위상이 눌지왕 1년(417년)에 이미 눌지왕에게 보고된 만큼, 삽량주는 최소 눌지왕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삽량주는 언제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정치적 영역으로 편입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후 북정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금동관, 금제 장식품 등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은 경주지방 대형 유물에서 나오는 것과 유사한데, 출토 유물 수준이 높은 것으로 볼 때 무덤 주인공은 신라 중앙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 친족에 해당하는 인물로 추정한다”며 “신기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북정동고분군 출토 유물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여기서 발견한 토기와 고분의 구조적 특징이 6~7세기 축조된 신라고분으로 간주하는 만큼, 이미 이때는 신라문화 영향 아래 양산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철산업과 기술 우수성 평가를 통한 가야사 복원
: 양산지역 역사광산과 유물을 중심으로
- 박맹언 부경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


한편, 박맹언 부경대 교수는 과학적 시각으로 양산지역과 가야의 연관성을 분석했다. 박 교수는 가야를 동아시아 최고 과학기술 선진국이자 첨단 제철산업, 금속산업 발상지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동아시아 교역 중심에 있던 해양대국이기에 현재 지역 구분을 초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근대 철광산 기록을 봤을 때 경상남도 철광산에 양산군 성서면 계촌리 철광산, 현재 물금지역 쪽에 광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물금광산에서 철을 제련하는 용광로 유적이 발견됐음을 볼 때 물금 오봉산이 고대 철광석 공급지임을 추측할 수 있고, 이런 조건이 가야를 ‘철의 왕국’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봤다.

















↑↑ 가야가 ‘철의 왕국’ 되는 데
고대 철광석 공급지인 오봉산과
물금광산 등이 큰 역할을 했을 것

박맹언 부경대 고고미술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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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는 “물론 철광석, 철제품 불균질성과 유물 희소성, 손상문제 등 현행 연구에도 한계를 보이는 모습이 있지만, 물금광산과 김해광산 등 철광석 산지로 추정되는 지역을 수집해 육안과 실체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조직과 광물 조성, 주성분과 미량성분,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등을 통해 철광석을 지구과학적으로 해석해보면 분명 가야사 복원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 4명의 발표가 끝난 뒤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 주제로 패널 질의응답 시간을 진행했다.
신용철 박물관장은 “백 실장이 오늘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며 “저는 당연히 양산 가야에 흔적이 있다면 그것이 금관가야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백 실장님은 그것이 아닌 별도 국가가 있었을 가능성을 발표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이 없기 때문에 유물이라는 부차적인 것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고 질문했다.


백 실장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삽량’과 ‘삽라’라는 이름”이라며 “경남 합천군은 옥전고분군이 발굴되기 전까지 누구도 가야 문화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그 안에서 나온 유물에서 ‘다라(多羅)’라는 지명이 있는 유물이 발굴됐고, 일본서기 등에 다라가 언급돼 가야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백 실장은 “사료가 워낙 없어 현재 단계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제상 관련 기록 외에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고,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신 관장은 “조 원장은 양산지역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나타나는 금관가야 유물들, 생활 유적에서 나타난 유적을 실증적으로 검토했는데, 5세기 이전 가야 세력을 문화 교류 결과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이곳을 하나의 존재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며 “조 원장은 후자의 관점으로 보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질의했다.


조 원장은 “5세기 이전에 대해 양산지역에도 가야 소국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며 “양산지역에 신라 토기가 아닌 가야 토기가 발굴되고 정상부에는 가야 고층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으나 연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저 역시 백 실장과 마찬가지로 ‘삽라국’이라는 금관가야 토기 문화권을 가진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답변했다. 이어 “그동안 양산지역을 신라 영향 아래 있다고 판단하고 연구를 해왔으나, 북정동고분군 등에서 가야 토기가 발견되고 관련한 자료도 있는 만큼 양산이 가야 소국이었다는 시각에 대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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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관장은 강 교수에게 “앞선 두 분 발표와 상반된 발표를 해주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의견을 다시 듣고 싶다”고 질문했다.


강 교수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 5세기 전후한 시점에 신라가 많이 팽창한 것이 사실”이라며 “양산지역에서 가야 유물이 발굴된 것에 대한 부분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서울과 부산도 문화 차이가 있듯, 같은 문화권에 있더라도 지역에 따라 문화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고 연구할 때 이런 점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 관장은 박 교수에게 “가야는 철의 나라로 유명한데, 철기와 관련해 과학적인 측면으로 접근해 발표했다”며 물금광산 같은 경우 고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구전됐는데, 물금광산이 이 연구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는지에 관해 물었다.


박 교수는 “김해 진영지역에서 발굴한 철광석 유적이 만일 물금광산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 시절 양산지역은 가야 영토라는 추정에 근거가 될 수도 있다”며 “단편적으로 전문성 없이 성분이 비슷하다는 주장은 광석이 형성되는 과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이런 화학적 분석은 옳지 않으며 지구화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신 관장은 “우선 역사학자 3명 시각이 다 다른 것은 그동안 양산 고대사 찾기 영역이 첫 단추를 끼웠다는 것이며 또 앞으로 양산 고대사 발굴을 위한 험난한 과정이 남아있다는 의미”라며 “이번 토론회를 시작으로 양산 고대사와 가야문화에 대한 더 활발한 연구를 기대한다”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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