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민희 minheek@ysnews.co.kr | ||
ⓒ 양산시민신문 |
추석 연휴에 만난 만큼, 이날 이야기 주제는 추석에 겪은 불편하고 부당한 일들이었다. 추석에 가장 불행했던 이야기 배틀(?)을 펼치고 있자니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많은 이야기는 ‘엄마’와 관련된 것이었다. ‘명절=쉬는 날’이었던 어렸던 우리는 커가면서 명절에도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엄마와 마주했다. 모두에게 쉬는 날이었음에도 엄마에겐 휴일이 아니었던 명절 풍경을 바라보며 엄마의 딸이었던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TV 앞이 아닌 엄마 옆으로 위치를 옮겨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게를 운영했던 엄마는 명절 전날까지 가게를 지켰다. 그 덕에 명절 음식 돕기는 온전히 내 몫이 됐고, 다른 가족들보다 반나절 먼저 할머니 댁으로 간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사실 아직도 이런 상황에 있어 불만이 많다. 그런 불만이 생긴 건 같은 집에 사는 남자들 때문이었다.
종일 집안을 가득 채웠던 기름내가 빠질 때쯤이면 집에서 아주 푹 쉬다 오는 아빠와 남동생, 그리고 그들 저녁을 차리겠다며 다시 부엌으로 오는 엄마 모습은 또다시 불편한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 엄마 모습이 싫어 어떨 때는 엄마 대신 내가 하겠다며 부엌에도 있어 봤고, 어떨 때는 일부러 엄마를 외면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집안에서 내 자리가 점차 부엌으로 정해지면서 나름 귀여움을 받았던 손녀딸은 며느리의 딸이 됐다. 수저 놔라, 반찬 더 가져와라, 컵 가져와라, 술 사 와라…. 각종 주문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됐다. 그런 와중에 TV와 핸드폰만 바라보는 남동생, 친척들과 내 연애, 결혼, 출산 이야기로 걱정하기 바쁜 아빠 모습까지 더해지니 안 그래도 불편했던 마음이 짜증과 미움으로 순식간에 바뀔 뿐이었다.
그런 불편함을 토로할 사람 역시 엄마뿐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너도 쉬어라. 엄마가 할 테니까”였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내 자리도 TV 앞이었겠지. 이제는 그 불편함조차 숨길 수밖에 없게 됐다. 왜 딸은 커가면서 엄마를 자꾸 이해하려 하고 감정이입을 할까. 그래 봤자 나만 힘들고 불편할 걸 뻔히 아는데 말이다.
고통밖에 남지 않은 우리 명절 신세 한탄은 ‘며느리 딸도 이렇게 힘든데 며느리는 더 힘드니 우리 생에 며느리 될 일은 없다’로 결론을 맺었다. 글로만 남녀평등을 배운 우리에게 행복한 결혼은 무리라며 마흔살이 될 때까지 혼자라면 같이 집 지어 살자는 약속까지 더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앞으로도 나는, 아니 우리는 불편한 마음을 안고 명절을 맞이할 것이다. ‘할머니는 그런 시대 사람이니까, 아빠는 그런 할머니 밑에서 컸으니까, 남동생은 그런 아빠를 보고 자랐으니까’라는 말에도 포함되지 않는 엄마와 내 존재에 대해 상처받기 대신 끊임 없는 불편함만 느낄 뿐이겠지. 아마 내가 ‘며느리의 딸’이 아닌 ‘아빠의 아들’이었다면 명절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