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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유년시절 영향일까, 청년이 된 두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한의사에 도전했다. 태용 씨는 대전대학교 한의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고, 용주 씨는 동신대학교 한의학과에 올해 입학할 예정이다. 이 원장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이다.
이 원장은 “조상 때부터 연구했던 한의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어 기쁘다”며 조선 말기 지어진 의서 ‘춘감서(春鑑序)’를 보여줬다. 이 원장은 “영남지방 명의로 이름난 이영춘 선생이 지은 책이나 바로 간행되지는 못했다. 이후 1927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제작돼 전해졌다. 제작을 위해 저희 조상이 힘을 쏟았다”며 “저 혼자가 아닌, 아들과 함께 한의학을 연구할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을 할 원동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두 형제가 한의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이 원장 영향이 컸다. 특히 태용 씨는 이 원장처럼 재수 끝에 한의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이 원장은 한의사를 꿈꿨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3년 동안 사회복지를 공부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전공에 회의를 거듭하다 자퇴를 결심했다. 다시 공부해 동국대학교 한의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석사와 박사를 거쳐 1994년 한의원을 개원했다.
태용 씨도 처음에는 건축학과로 전공을 정했다. 처음부터 누구 밑에 들어가 일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롯이 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것이 건축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공부해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태용 씨는 “부모님도 처음에는 조금 더 공부해보고 결정하는 게 어떻냐고 했지만, 건축은 제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고 한의학과를 목표로 다시 공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용주 씨는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한의학이 내 길인 것 같았다고 웃었다. 그는 “다양한 진로에 대해 고민했는데, 친구들이 장난스레 한의학을 민간요법과 혼동하거나 사이비처럼 여기는 게 마음에 걸렸다”며 “한의학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또한 한의학이라는 학문이 연구할 게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제가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과 함께했던 봉사 활동 역시 형제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외국인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했던 무료 한방진료 봉사에 따라가 침을 놓던 아버지 모습, 양산시드림스타트 사업에 참여해 저소득층 아동을 위해 봉사하던 모습 등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했다.
이들은 “꾸준한 장학금 전달, 사회봉사단체 활동 등으로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어른으로서 정말 본받을만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 원장은 앞으로 두 아들과 함께 연구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이미 지역에서 끊임없는 한의학 연구ㆍ개발로 그만의 한의술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한방 감기 예방법인 ‘삼복첩’을 비롯해 암 환자에게 산삼약침, 왕뜸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치료법,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대사증후군 성인병 치료를 위해 해독 발효 한약을 개발ㆍ활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한의학 발전 가능성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기에 삼부자가 힘을 합쳐 한의학의 경쟁력을 키우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지역사회는 물론 사회봉사에 대한 열의가 컸다. 두 아들이 졸업하고 한의사로 함께 활동할 수 있을 때 세 명의 힘으로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 원장은 “아무런 연고도 없던 양산에서 한의원을 개원한 지 벌써 24년째고, 두 아들은 양산이 고향이 됐으며 제게는 제2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며 “시민의 과분한 사랑으로 기반을 잡았으니 그 은혜를 되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원장은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두 아들이 졸업해 한의사로 활동할 때쯤 한방을 위주로 하는 요양병원을 건립하는 게 꿈”이라며 “양산시민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세 사람이 힘을 쏟겠다”고 덧붙였다.
두 아들 역시 “아버지 뒤를 잇는다는 게 부담스러우면서도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며 “열심히 배우고 익혀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는 아들이자 한의학 발전에 도움이 되는 한의사가 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