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서울 사위가 와서 춘추원에 갔는데 벚꽃이 참 좋더라. 우리 한창나이 때 한복 입고 곗날 음식해가 술 마시고 실컷 놀던 때 기억나나? 그때 생각하니까 내 청춘 다 어디 갔노 하고 눈물 나더라”
“주책이다 마, 사위 보기 부끄럽게”
지난 23일, 북부동 한 식당에 곗날을 맞은 할머니 10여명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임 이름은 ‘갑술(甲戌)생 동갑계’. 1934년 개띠 할머니들 모임으로, 우리 나이로 올해 85세다. 모임을 이어온 지 벌써 47년째니, 오랜 인연만큼이나 지역에 남아있는 계 모임 중에서도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지 않을까.
할머니들은 매달 23일을 곗날로 정했다. 한 달에 한 번, 친구들이 함께하는 식사자리를 가지며 그동안 안부를 나눈다. 특이한 것은 친구 가운데 누군가 돌아가시면 22일 또는 24일로 날짜를 바꿔 모임을 진행하는 것.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할머니들끼리 정한 규칙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할머니들이 모임을 시작한 건 지난 197 1년, 그들이 37세였던 때다. 농사일, 장사 등 생업에다 많은 자녀를 키우느라 바쁜 가운데 일탈처럼 나들이 갈 수 있던 곳이 바로 오일장이 서던 양산남부시장이었다. 계모임 회원들은 읍내부터 상ㆍ하신기, 북정, 어곡, 유산 등 대부분 시장을 이용하던 친구들이었다.
구성원들에게 모임 날짜를 알리는 것은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백정임 어르신 몫이었다. 백 어르신이 장 보러 온 친구들에게 모임 날짜를 알리는 방법으로 모임을 이어갔다. 당시로써는 40여명이 계 모임에 참여했으니 지역에서 꽤나 큰 모임으로 손꼽혔다.
어르신들의 돈독한 우정 덕분에 자녀들도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당시는 베이비붐 시대였던지라,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많이 했었단다. 그 가운데 가장 적은 자녀를 둔 집이 3명이었고 많게는 5명까지 슬하에 뒀다. 자녀들도 양산초, 양산중, 양산여중 등 같은 학교를 다니다 보니 아이들 학교 얘기, 자식 얘기를 나누며 우정이 더 돈독해질 수밖에 없었다며 웃었다.
40여명에서 시작해 13명 남은 계원
“인생에 남는 건 우정 나눈 친구들”
모임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 적당한 장소를 빌려 진행하지만, 당시에는 모임 구성원 집을 한 번씩 돌아가며 방문하는 식으로 계모임을 이어갔다. 거실은커녕 안방 하나만 있는 집이 대부분이었던 그때, 추운 겨울이면 구성원 모두가 집에 들어가지 못해 난감한 적도 있었다.
총무가 모아둔 계비를 써버려 낙심한 적도 있었다. 자녀가 많아 생활이 힘들었던 친구가 곗돈을 써버리곤 모임에 발길을 끊거나 이사를 가버린 일은 이들에게 아픈 상처였다.
“벌이도 시원찮은데 아이는 많지, 오죽했으면 곗돈을 다 쓰고 못 갚았겠나. 다들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른 뒤 그 상처는 원망이 아닌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던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친구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다들 제 일인양 합심해 돕기도 했다. 지장학 어르신 남편이 도의원에 출마했을 때 친구들이 열성적으로 힘을 보탰고, 결국 당선됐을 때는 내 일처럼 기뻤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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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술생 동갑계를 결성한 지 2년이 지난 1973년, 함께 통도사로 나들이 갔던 모습.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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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여년 전 서울 여행 모습. |
ⓒ 양산시민신문 |
그렇게 말도 많고 일도 많았던 모임을 10여년 넘게 이어갔다. 하지만 계원 각자 사정이 생겨 모임 참여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절반을 차지하던 어곡ㆍ유산 쪽 친구들이 빠져나갔고, 읍내에 살던 친구들 22명만 남게 됐다. 남은 친구들이라도 힘을 모아 열심히 살았다. 자녀들도 성장해 다들 시집, 장가가고 어느덧 증손자와 증손녀까지 보는 나이가 됐다.
할머니들 짝은 대부분 곁을 떠났다. 지장학ㆍ최순장 어르신과 정말분ㆍ김상영 어르신만 해로하고 있고, 나머지는 친구들을 위로 삼아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계모임에 오는 친구들 숫자가 하나둘씩 줄어드는 게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이미 4명은 돌아가셨고, 3명은 요양병원에 있거나 다리가 아파 아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남은 사람은 13명.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되고 16세 때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독한 배고픔과 어려운 현실을 이겨내는 데 헌신했던 할머니들. 질곡의 세월만큼이나 깊어진 주름이지만, 서로가 있었기에 좋은 시절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금까지 세월이 아깝지 않게 살아있을 때, 정신 있을 때 우리 더 자주 보자”
할머니들은 한층 깊어진 우정으로 똘똘 뭉친 친구들과 함께해 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