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금요일을 지나 황금 토요일 저녁 7시. 사람들이 한해를 정리하며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양산경찰서 중앙파출소 7명의 경찰관은 순찰 채비를 마쳤다.
중앙파출소는 신도시가 형성되기 전까지 양산 중심지였던 옛 시외버스터미널 일대 유흥가를 담당구역으로 한다. 매일 평균 수십 건의 ‘사건’으로 씨름하는 이곳에서 취재진은 연말 음주문화의 벌거벗은 실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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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경찰관 2명이 3개 조로 나눠 순찰을 시작했다. 윤현주ㆍ진형욱 경장이 탄 순찰차에 취재진도 몸을 실었다. 이들은 석계산단부터 삼성동 식당가, 다방마을 등 골목 곳곳을 돌았다. 진 경장은 “연말연시가 되면서 취객이 늘어나 시비가 붙었는지, 어디에 쓰러져 있는지 등도 확인한다”며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경우에는 의식유무를 확인한 후 긴급 상황 시에는 119를 불러 최대한 빨리 조처를 한다”고 말했다.
토요일 저녁, 요란한 파출소
윤 경장 일행이 순찰을 도는 사이 파출소에서는 최진형 경위가 사건 접수를 위해 대기 중이다. 최 경위는 “연말이다 보니 주취 소란이 많은 편”이라며 “단순폭행부터 술값시비 등 하루 보통 스무건 이상 접수된다”고 말했다.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서인지 취객 행패도 많이 줄었다며 이런저런 예기를 나누는 사이 다급하게 무전기가 울렸다. 9시 26분, 술에 취한 보행자가 길에서 넘어져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최 경위는 다급하게 순찰차량에 지시를 내려 현장으로 출동하게 했다.
9시 40분, 순찰을 나갔던 경찰들이 하나둘 복귀했다. 야식 시간이다. 라면과 김밥을 준비하는 동안 백진섭 경위가 “이제 ‘야식 신고’가 올 때가 됐는데”라며 웃는다. 야식을 먹을 때면 꼭 신고가 접수돼 직원들은 이를 ‘야식 신고’라고 부른다고 했다.
9시 43분, 보행자 교통사고에 출동했던 순찰대가 돌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피해자 상태가 위중한 모양이다. 술에 취해 넘어지면서 1차로 차량 유리창에 부딪히고 다시 2차로 인도 경계석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한다. 기분 좋은 술자리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셈이다.
술에 취해 탄 택시, 잃어버린 지갑↑↑ 진형욱ㆍ윤현주 경장이 택시에 쓰러져있는 여성 취객을 깨우고 있다. ⓒ
다시 순찰을 나가고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10시 48분, 한 취객이 택시에서 지갑을 분실했다며 신고를 해왔다. 파출소에 남아있던 백진섭 경위가 두 대의 순찰차에 각각 출동을 명령했다. 한 대는 피해자에게, 다른 한 대는 택시 이동 예상지점으로. 백 경위는 동시에 피해자와 통화하며 택시 차종과 운전기사 인상착의 등을 물었다.
부산 개인택시, 차종은 K5, 안경을 쓴 중년기사라는 정보를 바탕으로 부산지역 개인택시 회사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협조도 요청했다. 하지만 이날 술에 취했던 승객은 자신의 지갑을 찾지 못했다.
11시 30분, 다시 한 번 파출소 앞에 택시가 멈췄다. 이번엔 기사가 내리더니 짜증 난 표정으로 뒷자리에 쓰러져 있는 여자 취객을 가리키며 조치해 달라고 했다. 여성은 신발 한쪽이 없는 상태에서 택시에 널브러져 있었다. 진형욱 경장과 윤현주 경장이 최대한 부드럽게 어깨를 흔들며 인적사항을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꺼져”. 술에 취한 여성은 인사불성 상태에서 경찰에 욕설을 퍼붓더니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두 경찰관은 택시 안에 앉은 상태로 10분여간 여성을 다독인 후 남자친구에게 연락, 택시를 태워 돌려보냈다. 그녀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두 경찰관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우리의 폴리스 최고,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초점 잃은 눈을 보며 두 경찰관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11시 35분, 이번엔 선물가게 앞에서 주차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진 모양이다. 교통사고와 폭력 신고가 동시에 접수됐다. 택시기사가 잠시 불법주차를 하고 김밥을 사서 나오다가 그 자리를 찍어뒀던 사람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주변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시비에 가세하며 일이 커졌다. 다행히 출동한 경찰관들의 중재로 큰 사고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동거녀에게 맞고 선배에게 폭행 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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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 앞 곱창 가게에서 아주머니가 난동을 피운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관이 출동했지만 단순 말다툼으로 사건이 종결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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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를 넘기자 신고는 늘어났다. 북정동에서는 동거녀가 자신을 때린다며 한 남성이 폭력 신고를 해 왔다. 이 신고는 가정폭력으로 접수돼 ‘코드1’ 긴급출동 상황까지 커졌다. 알고 보니 동거하던 남녀가 같이 술을 마시다 의견 충돌로 여성이 남성을 때린 것. 딱히 피해도 없고 신고한 남성도 신고를 취소하길 원했지만 이미 경찰은 출동한 상태. 그렇게 1시간가량 경찰들은 본의 아니게 남녀 사랑싸움의 목격자가 돼야 했다.
이후에도 신고는 계속됐다. 1시 11분, 한 목욕탕 앞 곱창구이 가게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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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창회에서 폭행당한 피해자가 백진섭 경위에게 하소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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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 후에는 동창회에서 술을 마시다 싸움이 발생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피해자는 파출소를 찾아와 하소연을 시작했다. 한참을 하소연하던 그는 다음날 다시 조사하기로 하고 순찰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 치료를 받은 그는 다시 순찰차를 타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갔다.
새벽 3시 무렵. 불과 10여분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중앙동이 잠잠해졌다. 단잠에 빠진 아기처럼 조용했다. 백진섭 경위는 “오늘은 다른 때보다 잠잠한 것 같네요. 그만 가셔도 될 것 같은데요?”라며 취재진을 배려했다. 백 경위는 등 뒤로 벽에 걸린 ‘인청’(忍聽, 참고 듣는다)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이었다. 이날 중앙파출소는 술에 취한 시민이 늘어놓는 하소연을 참고 듣는 곳이었다.
“오늘 늦은 시각까지 취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파출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까지 취재진에 인사를 전하는 7인의 경찰들은 오늘도 중앙동의 안전을 위해 어두운 거리를 밝게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