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산수보전 양산지회(회장 최명수)는 지난 23일 홍룡사 일대에서 산지정화 활동과 함께 시민과 함께하는 심폐소생술 교육을 진행했다. 한국산수보전 양산지회 사진제공
양산외국인노동자의집(대표 김덕한ㆍ안덕한, 이하 외노집) 사랑의 봉사단은 지난 1일부터 6일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단체 대표와 자원 활동가, 상근자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된 2015 캄보디아 사랑의 봉사단은 의료봉사와 문화체험 프로그램 등 두 분야로 나눠 프놈펜 코미소 학교와 프놈펜 인근 오지마을을 돌며 봉사활동을 펼쳤다. ● 우리 친구 찬낙과 소팔을 만나다 활동 첫날인 지난 2일, 우리는 양산에서 일하다가 귀국한 두 명의 캄보디아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오전 10시, 찬낙 씨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왔다. 찬낙 씨는 한국 건설회사에서 통역인,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우리는 그와 함께 도시를 누비며 그가 건설에 관여한 건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오후에는 소팔 씨도 우리를 만나러 왔다. 소팔 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체류 기간이 남았는데도 더 빨리 귀국했다. 그의 건강을 염려했으나, 다행히 캄보디아에서는 한층 건강해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팔 씨는 태국, 일본 등지에 노동자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고용허가제 이전 산업연수제도에서는 민간 송출업체가 많은 문제를 일으켰었다. 내심 소팔 씨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그가 말했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태국 회사에서 월급을 못 받거나 문제가 생겨서 태국에 자주 다녀온다고. 계약서를 들고 가 현지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계약대로 해달라고 요구하고 월급을 받아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노집에서 그동안 많이 배웠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했다. 고마움과 감동이 밀려왔다. ● 이동진료팀 3일간의 일정 1년 만에 코미소 학교에 다시 왔다. 여전히 열정적인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후 이동진료 팀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를 위해 서둘러 길을 떠났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마을로 들어가려면 1~2시간이 걸렸다. 이동시간을 제외하면 진료시간은 4~5시간 남짓. 두 명의 의사와 한 명의 수의대학생, 그리고 코미소 스태프는 덜컹거리는 길을 달려 지붕도 없는 노천에 책상을 펴고 진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150여명의 환자를 보고 돌아왔다. 이동진료 봉사단이 도착하면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꼬부랑 할머니까지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나와 진료를 받는다. 우리나라처럼 어린이는 감기나 귓병, 어르신은 관절 계통 질환이 많았다. 간혹 더 정밀한 검사나 수술이 필요한 환자도 있었다. 이들이 준비해간 것으로는 너무 부족했다. 회의가 밀려왔다. 일시적으로 와서 하는 진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참을 줄 서서 진료를 받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마음의 위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국 문화 느끼며 추억을 쌓다 코미소는 직업학교다. 1년에 2번 신입생을 받고 5개월여간 직업교육 후 학생들을 배출한다. 학생 선발 조건은 딱 두 가지.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 그리고 정규 학교를 못 다니거나 중퇴한 학생. 입학한 학생은 오토바이 수리, 미용과 네일아트, 재봉반 중 적성에 맞는 과정을 이수할 수 있다. 문화체험팀 프로그램은 그들의 직업훈련에 도움이 될 만한 것, 현지에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한국 전통 느낌이 드는 것으로 준비했다. 천과 바늘로 브로치와 머리 고무줄 만들기, 천연염색, 모빌 만들기, 종이끈 장식품 만들기 등을 진행했다. 천연 염색 스카프는 캄보디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금세 말랐다. 코미소의 장난꾸러기 3인방 찌엔, 홍리, 차이야가 스카프를 이리저리 멋스럽게 둘러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즉석 패션쇼를 하자고 제안했다. 학생들과 봉사팀은 모두 학교 앞마당 차양 밑에 둘러앉았다. 패션쇼를 위한 음악까지 틀고 나니 제법 그럴싸했다. 음악 소리에 맞춰 다양하게 스카프와 가방을 연출한 학생들이 당당하게 걸었다. 관객들은 큰 박수와 웃음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 어버사또! 졸업을 축하합니다! 8월 5일, 우리의 마지막 날. 그날은 코미소의 졸업식이었다. 우리가 같이 만든 종이끈 공예품, 종이 모빌, 풍선과 즉석 인화기로 뽑은 학생들 사진으로 졸업식장을 꾸몄다. 졸업식을 위해 단정하게 차려입은 학생들은 쪽물을 들인 스카프와 가방을 하고 브로치를 꽂고 나타나 우리를 감동시켰다. 학생들의 전통춤 공연에서는 기쁨의 웃음이, 그동안 함께 공부했던 친구,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할 때는 슬픔의 눈물이 흘렀다. 우리 봉사단은 즉석에서 졸업식 축하공연 제의를 받았고 10분여 만에 아리랑과 전통민요 메들리를 연습해 2부 행사에서 선보여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졸업 후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 물었다. 이들은 기술을 배워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하나둘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보며 그들이 소박한 꿈을 이루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었다. 이미 삶의 곡절을 겪은 학생들, 졸업했다고 앞으로의 삶이 순탄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미소에서의 기억이 그들에게 언제나 작은 삶의 용기로, 기쁘고 빛나던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우리 방문이 이들에게 희망이 되길 기도하며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정해 양산외국인노동자의집 사무국장
“<양산시민신문>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취재기자 대부분이 10년 가까운 경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어떤 신문이든 취재기자가 가장 큰 자산이잖아요. 특히 경영 여건이 어려운 지역 주간지에서 10년 동안 근무해 온 기자들이 있다면 분명 큰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지역 소식에 능통하고 지역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한경은(29) 씨가 본지를 처음 접한 건 약 6년 전 다른 지역신문사에 취재기자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 지역신문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시작한 한 씨는 입사 후 만 2년 동안 취재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이 과정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대끼며 지역신문, 특히 지역 주간지에 대해 알아갔다. 지금은 평범한 직장에서 일하며 독자로서 본지를 구독하고 있지만 이러한 2년간의 경험 탓에 누구보다 지역신문에 대한 애정이 깊다. 한 씨는 그런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본지에 대한 쓴소리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솔직히 <양산시민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각종 행정정보나 시의회 활동 등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있지만 좀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내용은 잘 안 보여요. <양산시민신문>이 ‘알아야 할 정보’에 강하다면 ‘알고 싶은 정보’나 ‘재미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좀 약한 게 아닌가 싶어요” 독자마다 좋아하는 주제가 다르고 표현 방식도 달라서 재미있는 기사를 쓴다는 게 사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열심히 취재하고 고민해서 쓴 기사를 독자들이 읽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다. 한 씨의 주문처럼 독자에게 어떤 유익한 내용을 찾아, 어떻게 재미있게 전달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기자들 의무인 건 분명하다. 비판기능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한 씨는 비판 강도가 좀 약해 아쉽다고 말했다. “비판 기능도 좀 아쉬워요. <양산시민신문>에서 나오는 각종 비판 기사들을 보면 뭐랄까 좀 약하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아요.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한다면 좀 더 강하게, 그래서 독자들이 문제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언론에 있어 비판 기능은 무척 중요하다. 비판 없는 언론은 행정기관 홍보지 역할이나 정보지 역할밖에 못 한다. 하지만 비판 기능만 강조하다가는 오히려 사실관계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한 씨는 이런 부분에 대해 ‘기자 능력’을 강조했다. “물론 자극적인 보도가 자칫 본질을 호도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도 잘 압니다. 그러니 ‘자극적’이라기보다 ‘적극적인 지적’, ‘따끔한 충고’ 등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겠죠.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는 선에서 독자들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그런 ‘화끈함’ 말이에요. <양산시민신문> 기자라면 그 정도 능력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밖에도 긴 글을 좀 더 짧게 써줬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쳤다. 전면기사의 경우 글자가 많으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만큼 사진 등 이미지 활용을 풍성하게 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기자들이 많은 <양산시민신문>인 만큼 좋은 기사를 더 많이 생산하는 신문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독자도 더 많아지고요. 그러려면 먼저 독자들이 재미있어하는 신문이 돼야겠죠?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열심히 응원할게요”
한국다움이란 무엇일까. 문화체육관광부가 창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한민국 유전자(DNA)를 찾는 공모전을 펼쳤다. 양산 출신 김주은 씨(21, 물금읍)가 동영상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김 씨가 생각하는 한국다운 영상은 바로 순우리말이다.
아이 영어교육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엄마들이 있었다. 아이와 함께 영어를 공부할 만한 실력이 되고 싶은 것. 이들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줄 무료 영어 재능기부자 이시정 씨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수업을 하는 현장을 찾았다. 즐겁고 유쾌한 이 씨의 수업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평산동에 있는 황칠나무 요리전문점 황금정(대표 방인환)이 지난달 29일 개업을 맞아 축하화환 대신 받은 300만원 상당의 쌀을 평산동주민센터에 기탁했다. 평산동 사진제공
황산문화체육공원을 둘러 흐르는 낙동강 물길에 일가족 세 사람이 탄 나무배 한 척이 띄워졌다. 처음에는 흔들거리던 배가 이내 중심을 잡고 노 젓는 방향에 따라 물길을 헤쳐나갔다. 이 배를 띄운 사람은 레포츠 보트를 제작하는 하송훈(46, 물금읍) 씨. 이들이 탄 배는 ‘우든 카누(나무로 만든 카누)’다. “외국에는 카누 인구도 많고, 카누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만큼 활성화됐죠. 우리나라에도 몇몇 지자체에서 카누로 관광 사업을 하고 있어요. 비전 있는 분야인데, 아직 양산에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도전했죠”
6.25 전쟁에 참전해 해군 소속으로 황해도 피란민 구출 작전에 참전하는 등 조국을 위해 헌신한 정용신(83) 어르신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동안 바쁜 삶으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던 정 어르신은 울산보훈지청의 6.25 참전유공자 발굴 사업 중 유공 사실이 확인돼 뒤늦게 국가유공자증서를 받게 됐다. 울산보훈지청(지청장 주영원)은 7.27 정전협정과 유엔군참전의 날을 맞아 지난 22일 양산시청에서 예비역 해군이자 6.25 참전유공자인 정 어르신에게 대통령 명의 국가유공자증서를 전달했고 밝혔다. 울산보훈지청에 따르면 정 어르신은 1952년 5월 29일 해군에 입대해 동해와 서해에서 해안구조대로 활동했으며, 황해도 피란민 구출작전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국가 수호를 위해 계속 복무하다 1961년 11월 15일 전역했다. 정 어르신은 “생업을 위해 해외에서 체류하는 일이 잦았고, 귀국 후에도 생업에 바빠 국가유공자 등록신청을 못 했는데 보훈청에서 가정방문 신청 안내로 등록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정 어르신에게 국가유공자증서를 직접 전달한 나동연 시장은 “우리나라 자유와 평화를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한 분들이 있어 지금의 행복과 안녕을 누릴 수 있게 됐다”며 “그 희생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뒤늦게라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게 돼 다행”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에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은 정 어르신은 국가보훈처에서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명예로운 보훈’의 주요 정책과제인 ‘6.25 참전유공자 미등록자 발굴’ 사업을 통해 등록하게 된 경우다. 2015년 1월부터 현재까지 15명을 발굴ㆍ등록했다. 울산보훈지청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사이에 발생한 전투와 1948년 8월 15일부터 1955년 6월 30일 사이에 발생한 전투에 참전한 사실이 있지만 아직 참전유공자 등록신청을 하지 않은 분은 국가보훈처나 울산보훈지청으로 연락해달라”고 당부했다. 홍성현 기자
나는 매주2회 화이기스화진화장품 양산지점에서 두피, 등, 허리 마사지를 몇 년째 받으러 다닌다. 하지마비로 고생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마사지를 받고 몸이 많이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 유명화장품 회사 회장으로 2006년 ‘즐겁게 일을 하면 반드시 복이 온다’는 믿음으로 국민일복운동본부를 만든 강현송 총재. 강 총재는 매주 2회 전국 250여 아이기스화진화장품 지점 위성영상을 통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익숙하고 잘 알려진 성경구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긍정버전으로 인류 불행 원인과 해결책을 명쾌하게 제시하는 일복강의를 하고 있다. 2시간 동안 강의에서 자사 제품 홍보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사)국민일복운동본부 강현송 총재 강의는 인류철학의 대명제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한다. 강 총재는 “‘나’를 정의할 때 나는 어려서부터 기억하고 경험하고 배우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나’를 나라고 한다”며 “즉 지금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고 경험한 것들로 본 나를 ‘나’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정의된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라고 볼 수 없다”며 이러한 현상을 눈에 보이는 세계 즉 ‘본능의 세계’라고 설명했다. 강의 요지는 인생성공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다름 아닌 자기에 맡겨진 일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눈가림식으로 건성건성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겁게 하면 틀림없이 복이 온다는 내용이다. 강 총재는 강의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나갔다. 그가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는 받을 빚이나 갚을 빚이 있는 나로 세분화했다. 여기서 강의를 듣는 대부분 사람은 “나는 받을 빚도 갚을 빚도 없다”고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강 총재는 “맞다. 당신은 받을 빚도 갚을 빚도 없다”며 “당신이 말한 빚은 단지 눈에 보이는 빚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가 말한 빚은 전생의 유전자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전생의 유전자로부터 받을 빚이 있다면 빚을 받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빚을 졌다면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어 “우리 삶의 모든 병이나 불행은 빚을 받고 빚을 갚는 과정과 연관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후 그의 강의는 일복(福), 기(氣)의 관계에 대한 심화설명이 이어졌다. “흔히 모든 만물은 기(氣)를 뺏고 뺏기는 관계다. 일복은 이 문제의 근본인 빚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일은 자가 발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정 수준의 일을 하면 자기 쓸 만큼이거나 일정량 일복 피크선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령 100이라는 일복피크선이 있다면 이 선을 넘기 전까지는 내가 소비하는 것이지만 이 선을 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유전자 빚을 갚기 시작하는 것이다” 강 총재는 “주변에 어느 분야든지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미쳤다’라는 소리를 듣는다”며 “열심히 일해서 진 빚을 모두 갚아 받을 것만 남아 똑같이 일해도 잘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그는 자아개발에 대해 강의를 계속했다. 육체와 정신이 일에 집중된 몰입상태에서 열심히 일하고 일에 미치면 이는 자아개발로 이어진다. 그는 40여년 전 자신의 자아개발이 됐던 막노동 시절 경험을 언급하며, 톨스토이 작품을 소개했다.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에서 주인공 레빈은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보여준다. 특히 레빈은 귀족, 백작, 지주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농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레빈은 농사를 지으면서 일에 정신몰입을 한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감에 따라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됐다. 그런 때에는 이미 손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낫 그 자체가 배후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기라도 하듯이 레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레빈이 얼마나 일에 몰입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일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것에 얼마나 몰입하는 가는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일복운동의 취지는 인간이 정신의 힘을 깨닫고 일의 개념을 달리할 때 자아실현과 더불어 능력을 개발해 성공과 행복, 부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 총재는 강원도 홍천 산골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살벌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막노동, 택시기사, 어부 등 37가지가 넘는 직업을 전전하며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인생관과 성공 철학을 정립한 인물이다. 현재 250여명의 정직원과 2만여명의 사원을 거느린 화장품 업체 회장이면서 수많은 대학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일복특강’을 진행하면서 강원대 초빙교수로 나가기도 한다. 강 총재가 강의하고 있는 일복운동을 제2의 새마을 운동으로 승화시켜 일할 수 있고 생산성이 높은 청ㆍ장년층에 이 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전개하면 어떨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4년 전 서울에서 직장 다닐 때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방에서 혼자 살아야 했어요. 텅 빈 방안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 싫었고, 함께 할 가족이 필요했죠. 그러다 강아지와 함께 살기로 했고, ‘하루’를 만나 외롭고 팍팍한 서울살이를 버텨냈어요. 그때는 사람보다 솔직한 강아지가 좋았죠. 이제는 눈빛만 봐도 어떤지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하루. 가족처럼 생각하면서 강아지에 대해 많이 공부했고, 자연히 하루의 미용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현재 중부동에서 애견미용샵 ‘행복한 강아지 틱독’을 운영하는 애견미용사 윤애지(26) 씨 이야기다. 윤 씨처럼 강아지를 평생 함께할 반려동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강아지 미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아졌다. 마치 자기 아들이나 딸이 다른 사람에게 예쁘게 보였으면 하는 마음같이 강아지도 예뻐 보이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애견미용이 단순히 강아지의 미적인 부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강아지와 사람의 위생을 위해서가 먼저다. 미용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강아지 털이 엉키기 시작하면서 잘 마르지 않는다. 그러면 곰팡이가 생겨 습진에 걸리는 등 병으로 강아지가 괴로워할 수 있다. 강아지뿐 아니라 사람도 피부가 약하거나 예민하면 감염될 수도 있다. “병이 옮거나 털이 많이 날리는 등 문제가 발생하면 강아지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강아지 때문이 아닌 강아지를 관리하지 못한 사람 때문인데 강아지 탓만 하죠. 이틀에 한 번 빗질만 해줘도 문제를 막을 수 있는데 모르거나 귀찮아하는 분이 많아요 교육없이 가정에서 하는 미용은 ‘위험’ 애견미용샵에는 털이 긴 견종, 짧은 견종 등 견종에 따라 미용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때’를 잘 맞춰 데려가는 게 좋다. 푸들, 말티즈와 같이 털이 긴 경우 두 달에 한 번 미용샵을 찾아 관리해야 사람과 강아지 위생에 도움이 되고 병원비도 아낄 수 있다. 강아지를 전문샵에 맡기지 않고 집에서 미용할 경우에는 특별히 유의할 점이 많다. 윤 씨는 한 손님이 인터넷에서 파는 싼 기계로 강아지 털을 다 밀어온 것을 보고 당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미용에 사용하는 기계마다 용도가 다른데 그걸 모르고 짧은 날로 몸을 깎으면 모근이 손상되요. 기계 열 때문에 화상을 입어 다시는 털이 자라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집에서도 미용이 가능하지만 되도록 제일 긴 날로 너무 짧지 않게 깎아주는 것이 좋아요” 집에서 간단히 발바닥을 다듬어줄 수 있지만 발가락 사이나 얼굴 등 예민한 부분은 조심해야 한다. 미용실에서는 부분적으로 섬세한 기계를 사용해 젖꼭지나 옆구리, 겨드랑이를 다치지 않게 깎아줄 수 있지만 집에서는 힘들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미용한 사람도 예민한 곳에 상처를 내기도 하죠. 그럴 경우 병원비도 들지만 강아지에게 트라우마가 생겨 다시는 자르지 않으려 할 수도 있어요. 때문에 꼭 집에서 미용을 하고자 한다면 간단한 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해요” ‘애견 미용사’ 전문적 직업인만큼 공인자격 필요 강아지의 위생과 아름다움을 책임지는 애견미용사는 날카로운 미용도구로 강아지와 소통하며 털을 자르는 것부터 예민한 발톱을 깎는 등 미용 전반을 담당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필요하다. 윤 씨는 서울애견미용학원에서 1년 반 동안 공부해 애견미용 전문자격을 얻었다. 이후 강남에서 애견미용사로 일하다 지난해 양산에 애견미용샵을 열었다. 보통 ‘미용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돈을 이렇게 받아?’, ‘하는 게 뭐가 있다고 오래 걸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2kg 정도 나가는 무거운 기계를 들고 움직이는 강아지가 다치지 않게 신경 써야 해 육체노동에 가까운 것. “많은 애견미용사가 어깨, 허리, 손목 등이 아파 10년 이상 하긴 힘들죠. 가만히 있는 강아지를 미용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강아지의 성격, 부위별 유의해야 할 점 등을 고려해 안전하게 미용을 해야 하는 어려운 직업이에요. 하지만 강아지가 할퀸 상처나 미용사의 전문성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죠” 애견 미용사는 국가 공인 자격증이 없다. 농림축산식품부 산하에 있는 한국애견연맹과 한국애견협회에서 주관하는 자격증만 있을 뿐이다. 이런 탓에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애견 미용사로 일하면서 강아지를 함부로 다루는 경우도 있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만큼 국가 공인 자격증이 생겨 미용사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강아지 미용도 안전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일이나 결혼식 등 특별한 날에만 먹던 케이크가 더욱 화려하게 변했다. 특별한 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수제 케이크가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고 우리 일상에 녹아든 것. 이제 일반 케이크보다 자신이 원하는 모양과 맛을 내는 케이크를 주문하거나 직접 만들어 먹는 취미를 가진 사람도 늘었다. 삼호동에서 슈가카페 ‘커피앤유 작업실’을 운영하는 이가현(38) 씨도 취미로 시작해 케이크와 만났다. 우선 5년 전 직장을 다닐 때 우연히 어느 가게 에서 예쁜 수제 케이크를 처음 봤다. 문득 예쁜 케이크 만드는 법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 당시 서른셋, ‘적은 나이도 아니고 회사 그만두고 여자 혼자 뭐하겠냐’는 어른들 걱정도 많았다. 그런 걱정을 없애기 위해 케이크를 배우러 울산, 부산, 서울 등 다양한 가게를 찾아갔다. 하고 싶었던 것을 배우면서 밤새워 공부하기도 하고 새벽에 첫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 수업을 듣기도 했단다. 이리저리 다니며 가게마다 차이를 배웠고 자신만의 케이크를 만들어 팔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설탕’으로 만들어 오래 보존 가능 이 씨가 처음부터 가게에서 케이크를 만든 것은 아니다. 2011년부터 평범한 카페로 시작했고, 현재는 주를 이루던 커피에서 케이크로 업종을 바꾼 것. 그가 카페를 시작할 당시 가게 근처는 논과 밭이었고 주로 나이 많은 분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어 초등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많이들 카페에 들러주셨다고 한다. 이제는 집안의 대소사까지 다 알 정도로 가까운 단골손님도 많다. “처음에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제 케이크가 뭔지도 몰랐어요. 비싸기만 비싸다는 반응이 많았죠. 그런 인식을 깨기 위해서 작년부터 손님들에게 슈가크래프트 케이크를 선보이기 시작했어요. 예쁜 케이크를 만들어 가게에 전시하고 블로그에 올려 소개하니 하나 둘 특별한 케이크를 찾는 사람이 생겼죠” 슈가크래프트는 영국식 설탕 공예로, 천연방부제인 ‘설탕’을 주재료로 한다. 설탕에 달걀흰자, 젤라틴 등 재료를 섞어 목적에 맞는 반죽을 만들어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 씨는 슈가크래프트를 활용해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오르골, 컵, 보석함, 테디베어, 가방, 자동차 등을 만들었다. “슈가크래프트 케이크가 다른 케이크에 비해 오랫동안 보존도 가능해 매번 이벤트 때마다 사용할 수도 있죠. 알뜰한 어머님은 케이크를 한 번 쓰고 파는 분도 있어요. 케이크를 먹어보신 분은 슈가 자체가 마시멜로우 맛이 나 의외로 달지 않다고 반응해요. 어른들도 좋아하시지만 너무 예뻐 ‘이걸 어떻게 먹냐’는 분이 많죠” 캐릭터 모양부터 떡 케이크까지 다양 최근 어머니들은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는 분도 있단다. 그는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으로 바비인형 슈카 케이크를 꼽았다. “중간에 진짜 슈가 인형을 만들어 넣을 수 있었지만 다 먹고 인형도 사용할 수 있게 진짜 바비인형을 감싸 세척해서 넣어줬어요.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먹을 수 있게 드레스 부분에는 빵을 많이 넣어 크게 만들었고, 미니장미로 한결 더 샤랄라한 분위기를 연출했죠. 뒷모습도 큰 리본이 흘러내리는 모습과 미니장미로 섬세하게 표현해 아이가 참 좋아했답니다” 주문이 오면 시안을 만들어 보여주고 판단해 가족에게 주듯 천연재료를 사용 해 정성스럽게 만든다. 주문은 생일 뿐 아니라 결혼기념일, 부모님 선물, 상견례 등 각종 기념일과 개인적인 선물 등 다양하다. “한 번은 아버지 제사 때 사용할 케이크 주문도 있었어요. 제 아버지에게도 드리지 못한 케이크 주문을 받으니 뭔가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었죠. 나는 뭐 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 추석 때 가족들에게 만들어 줬어요. 케이크를 만들면서 손님에게 많이 배워요” 그는 슈가크래프트 케이크 이외에 일반 제과점 케이크와 완연히 다른 꽃이 올라간 ‘버터크림플라워케이크’와 100 % 앙금으로 만든 ‘앙금과자’, 어른들이 좋아하는 ‘커피양갱’, ‘앙금떡케이크’도 제작한다. 이 씨가 가장 최근 만들기 시작한 앙금떡케이크는 우리의 떡을 앙금으로 장식해 더욱 특별하다. 직접 쌀을 불려 빼낸 뒤 방앗간에서 빻은 떡에 천연재료로만 색을 낸 앙금 꽃을 얹으면 건강에 좋은 화려한 케이크로 완성. 빵을 싫어하는 어른부터 먹는 것에 예민한 임산부와 아이들의 입맛까지 사로잡는 인기 메뉴로 자리 잡고 있단다. 이밖에도 떡을 활용해 앙금꽃컵설기와 캐릭터설기 등도 선보이고 있다. “여러 가지 중 이제 우리 떡 중심으로 가게를 운영할 생각에요.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떡이 화려해질 것이란 생각을 못 했죠. 화려한 우리 것을 제대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수제 떡 가게에서 하루에 3~4시간씩 수업도 듣고 있어요. 계속 케이크를 만들어 사람들이 제가 만든 것을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양산산림항공관리소(소장 손수식)는 지난 17일 관리소 내 비행훈련장에서 산악사고자, 조난객 구조에 대비한 항공구조훈련을 진행했다. 양산산림항공관리소 사진제공
(사)경상남도지체장애인지회 양산시지회(지회장 김대연)는 지난 17일 지역 내 지체장애인 300여명을 대상으로 에덴밸리 리조트에서 하계수련대회를 진행했다. 지체장애인협회 사진제공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떠올리면 전통 다도와 녹차를 떠올린다. 그마저도 다예(茶藝, 차를 우려내는 법과 차를 즐기는 예술을 아울러 말하는 것)를 익히기 어려워 전통방식의 차 즐기기보다 간편하게 티백으로 우려내는 차를 더 선호한다. 반면에 영국은 일과 중 ‘애프터눈 티타임(Afternoon tea time, 오후 시간 스콘이나 케이크를 곁들여 차를 먹는 시간)’이 있을 정도로 홍차를 사랑하는 나라다. 우리나라에서 차(茶)는 아직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외에 구색을 갖춰 놓는 메뉴 수준일 뿐이다. 그래도 점차 차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차 문화 보급을 위해 티하우스(Teahouse, 찻집)가 생기는 추세다. 홍황금(60) 원장 역시 4년 전, 하북면 한송예술촌에 ‘백비차문화공간’을 세우고 동ㆍ서양의 다양한 차와 차 문화를 알리고 있다.
“경비원 아저씨는 늘 우리 곁에 있잖아요. 항상 가까이서 어둡거나 깜깜할 때 손전등 비추며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 참 든든하죠. 지역신문도 경비원 아저씨처럼 우리 곁에서 어두운 곳을 밝혀줬으면 좋겠어요” 북부동 옛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커피전문점 ‘카페라떼’를 운영하는 최원자(47) 씨는 20대 초반에 양산으로 이사 왔다. 병원 응급실에 2년 정도 근무하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인 지난 2004년 커피전문점 문을 열었다. 커피전문점 대표이자 문학회원으로 커피를 내리고 글을 쓰기도 하는 최 씨는 지역신문이 ‘경비원 손전등’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것도 참 좋죠.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어두운 곳에서 힘들게, ‘찍’ 소리 한 번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신문이)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고요. 그래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비춰주고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손전등을 들고 다니는 경비아저씨 모습을 보며 ‘아, 우리 아파트 참 든든하다’라고 느끼듯 지역신문이 그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 씨가 지역신문을 보기 시작한 지 4~5년. 신문을 통해 사람 이야기도 보고 정치 이야기도 들어왔다. 이런저런 행사나 정보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다. 어쩌면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 아쉬움은 그대로일지 모른다. “지역신문은 일간지보다 지역 관련 정보가 많아서 좋아요. 지역 구석구석 어떤 행사를 했는지 다 알려주니까요. 신문에서 아는 사람이 상을 받았거나 행사를 한 소식을 보면 축하 인사를 전하곤 해요. 축하받는 사람도 축하하는 저도 기분 좋은 일이죠” 최 씨는 지역신문을 가장 지역신문답게 활용하는 독자인지도 모르겠다. 지역신문이 지역에 밀접한 소식을 쏟아내면 거기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골라낸다. 그 정보를 이용해 다시 주변과 공감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최 씨는 그렇게 지역신문을 따뜻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양산시민신문>은 친정식구 같은 느낌이에요. 신문 속에서 내가 아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어서 그런가 봐요. 아는 사람이 많고, 신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포근하고…. 그래서 다른 신문은 그냥 ‘신문’ 같은데 <양산시민신문>은 친정식구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본지를 ‘친정식구’라며 따뜻하게 격려하던 최 씨는 지역신문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주문도 했다. “지역신문과는 좀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북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사는 게 바쁘지만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함께해야 할 사람들인 만큼 서로 이질감 느끼지 않도록 신문 귀퉁이에 통일 칼럼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지역신문과 안 어울리는 주문이라고 느꼈다. 그냥 최 씨가 ‘어렵게 사는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 깊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지역에도 북한이탈 주민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는 점, 이들도 우리 지역사회 구성원인 만큼 분명히 지역신문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다. 최 씨의 주문이 전혀 일리 없는 게 아니었다. 최 씨는 그렇게 인터뷰 내내 어렵게 사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부탁했다. 그의 부탁은 지역신문 본연의 역할을 꼬집은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실천이다.
사람의 눈과 코, 마음까지 사로잡는 식물. 식물은 자체의 모습만으로도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식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신체적 능력이 향상되고 심리적인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것. ‘삽질하는 꽃쟁이’라는 꽃집을 운영하며 원예치료를 하는 박은형(41) 씨는 20대 후반, 일본에서 꽃과 만났다. 그는 당시 직장생활에 무료함을 느껴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어 학원에 다녔다. 학원 선생님이 어학연수를 추천했고 1년 동안 일본에서 일본어 공부에 몰두했다. 일본에서 공부한 지 1년이 다 돼 갈 무렵 한 중고서점에서 꽃 잡지를 발견했다. 박 씨는 어릴 적부터 장날에 꽃을 팔면 친구나 주변 사람에게 사 줄 정도로 식물에 관심이 많았기에 책을 집중해서 읽었다. 그러다 잡지에서 꽃을 배울 수 있는 전문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 정보를 보고 현지에서 배운 일본어를 활용해 동경상가학원 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박 씨는 꽃집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나를 위한 꽃 한 송이’에 대한 철학을 배웠다. “승진하거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우리나라는 보통 나무를 보내요. 반면 일본은 개업식이 꽃바구니로 가득할 정도로 꽃 소비가 많죠. 일본에서 꽃은 누군가를 위한 선물보다는 자신을 격려하고 축하하기 위해 사는 경우가 많아요. 꽃이 주는 위로를 알기 때문이죠” 꽃 한 송이가 기쁨 되는 자연스러운 치료 과정 김 씨 가게에는 많은 사람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찾아온다. 그는 꽃이 좋아 꽃을 사러 오거나 원하는 레슨을 받기 위해 온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진짜 치유를 느꼈다. 사람들이 꽃이라는 공감대로 이야기하며 웃고 좋아하는 모습을 봤고 그 자체가 치료라는 것을 깨달은 것. “자신을 위해 준비한 꽃 한 송이로 위로받을 수 있을 만큼 원예치료는 거창한 것이 아니죠. 다쳤을 때 연고를 바르면 얼른 낫는 것과는 달라요. 길가에 핀 꽃을 보며, 누군가를 생각해 꽃을 준비하며, 평범한 저녁식사에 꽃을 하나 꽂아 두는 등 삶의 작은 부분들이 치유죠. 근사하게 치료를 받고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김 씨는 지난해 ‘꿈 키움 교실’ 학생을 대상으로 원예치료 수업을 진행했다. 그는 평소 학교생활 적응이 어려웠던 학생들이라 원예활동도 못 할 것이란 생각은 편견이라며 오히려 더 잘한다고 자랑했다. “식물심기를 하면서 식물 잎이 떨어지면 안 되니 조심하고, 자신이 키우는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죠. 학교 창가에 놔두고 자라는 과정을 관찰해 식물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요. 플라스틱, 철제 같은 것을 많이 만지는 아이들이 생명의 소중함도 느낄 수 있어요. 다른 친구의 식물과 비교하기도 하며 다양한 대화를 나누는데 이런게 자연스러운 치료 과정이죠” 김 씨는 나아가 자신의 꽃집 자체를 치유의 장소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가게를 지나다니며 꽃을 보고, 꽃 한 송이를 자연스럽게 살 수 있게 하고 싶어 했다. 가게를 지나다니며 보는 예쁜 꽃, 꽃 한 송이를 살 때 기분 좋은 마음처럼 가게가 누군가의 하루에 위로가 되길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유교의 뿌리를 잇는 ‘향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교리’라 불렸던 마을. 강서동 옛 교리마을 출신들이 ‘교리향우회’를 결성하고 마을에 대한 향수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난 11일 오전 10시 교동마을회관 2층 강당에서 교리향우회가 창립총회를 가졌다. 회원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한 창립총회에서는 안승우 태산건설 대표(사진)가 초대 회장에 추대됐다. 안 회장은 인사말에서 “살아가면서 누구나 어린 시절 아련한 그리움과 마주하게 된다”며 “우리 교리 향우회는 단순한 추억그리기, 회상 나누기를 넘어 고도 산업화에 편승하면서도 물적으로는 옛 정취의 멋스러움을 발굴ㆍ보존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강구해 마을의 전통을 계승ㆍ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안 회장은 “비록 늦은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교리향우회가 우리 선ㆍ후배 가슴속에 깊이 존재해 항상 어른을 존경하고 선배를 공경하며 후배를 양성함에 주저하지 않는 전통을 만들겠다”며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 주신 여러 회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교리향우회는 몇 해 전부터 마을 주민과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던 향우를 중심으로 향우회 조직 필요성이 제기돼 오다 지난해 2월 안승우 현 초대 회장과 박상철 부회장, 조문관 전 경남도의원 등 향우 10여명이 모여 창립을 결의하면서 본격 준비에 들어갔다. 이후 올해 2월 30여명의 향우들이 모여 창립을 결정했고, 지난 5월 14명의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해 기본 회칙과 회원자격을 정했다. 이날 초대회장에 안승우 대표를 만장일치 추대했다.
양산여성새로일하기센터(센터장 김정숙)는 지난달 30일 국비무료 직업훈련인 실버케어관리사 과정 수료식을 진행했다. 양산여성새로일하기센터 사진제공
달랑 나무젓가락 하나로 모래 더미를 이리저리 휘적이자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한 새 한 마리가 빚어진다. 어디 그 뿐이랴,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래 알갱이가 바다 속 용궁으로 잡혀간 토끼로 부활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기왓장을 두른 한옥 한 채로 서고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 어린왕자가 된다. 무생물인 모래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김길만(56) 모래조각가.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사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중ㆍ고등학교를 다닐 때 미술 시간이 되면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다. 헌데, 집안 형편은 돈이 많이 드는 붓 대신에 돈을 벌어주는 기계 공구를 들게 했다. 양산 교동에 있는 삼양화학에 취업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친구와 해운대로 바람 쏘이러 나갔다가 운명처럼 모래와 만났다. 해운대 백사장에 앉아 모래를 만지며 노는데 감촉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란다. 장난삼아 어릴 때 소꿉놀이 하듯 인어공주 상을 만들어 봤다. 사람들 감탄이 쏟아졌다. 조각을 배운 적이 없는 터라 눈, 코, 입도 만들지 못한 얼굴인데도 말이다. 송정해수욕장이 연습실 시간만 나면 사람이 별로 없는 송정해수욕장으로 가 모래와 놀았다. 가재, 문어, 고래, 사람 얼굴, 건축물 등 닥치는 데로 조각을 하고 허물어지는 일상이 수없이 반복됐다. 돈이 되는 일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모래조각 교재도,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다. 그저 좋았다. 하루는 정신없이 모래 조각에 빠졌는데 집에 가려고 보니 신발이며 소지품이 없어졌더란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그의 모래조각을 구경하러 몰리는 바람에 장사에 지장이 있다며 그를 고깝게 여긴 상인 누군가가 소지품을 숨겨버린 것이었다. 맨 발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끝까지 한 번 가보자. 그렇게 한 해, 두 해, 짬만 나면 송정으로 나가 모래와 뒹굴었다. 그때, 비가 와도 모래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눈이 오면 모래 알맹이가 얼음처럼 조각을 못할 정도로 차가워진다는 것도 알았다. 여름이나 봄, 가을에 비해 겨울 모래색이 더 좋은 것도 터득했다. 여름엔 햇살이 너무 강렬한데 겨울 오후 3시경, 햇살이 사위어가는 그 시점에 모래가 금빛으로 드리우며 환상적이란 걸 알았다. 작품, 중ㆍ고 미술 교과서에 실려 1987년 모래조각을 시작해 어언, 28년의 시간이 흘렀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지자체 마다 앞 다투어 축제를 열면서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축제뿐만 아니라 서울 (주)애버랜드 초청 모래조각 시연, 강원도 양양 낙산비치호텔 초청 모래조각 시연, 해운대 아쿠아리움과 조선비치호텔 초청 모래 조각 시연, 2006년 부산 벡스코 대한민국 축제박람회 모래조각 시연, 한국 어항협회 초청 서울 코엑스 모래조각 시연, 대구mbc 출연, 서울 코엑스 내나라 여행 박람회 모래조각 시연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나아가, 1998년 중국 용정 해란강에서 광복절 기념 모래조각 시연, 2000년엔 미 한인회 초청으로 미국 시카고 몬트로스 호변에서 모래조각 시연을 펼쳤고 시카코 ‘썬 타임지’ 1면과 ‘트리분지’에 한국모래조각가로 소개됐다. 장승 꾼이나 화가는 차고 넘치지만 모래조각은 우리나라에서 그가 유일했다. 자고 나면 허물어지고 없을 모래조각을 왜 하냐며 비싼 밥 먹고 할 일없는 미친놈이라던 시중의 비아냥은 찬사로 바꼈다. 나무젓가락 조각 세계 유일 문화예술계에서도 비로소 모래조각을 예술의 한 분야로 받아주었다. 그의 작품 ‘바닷 가재’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해마다 꾸는 꿈’은 고등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에 실렸다. 전국에서 청소년 17만명이 그의 작품을 보며 미술 공부를 하는 셈이다. 그가 중ㆍ고등학교 때 토속적인 박수근 작품과 파란색 물감을 많이 쓰던 김환기 작품을 동경하면서 자랐듯 17만명 중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의 작품을 보며 꿈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래 조각가가 우리나라에는 드물지만 외국에는 꽤 많이 있다. 그런 모래조각가들 중에서도 그는 남다르다. 외국 작가들은 금속성 모래조각 칼을 여러 개 사용한다. 한 싱가포르 작가는 무려 14개의 조각칼을 쓰더란다. 세밀한 부분을 새기는 가는 칼에서 선이 굵은 큰 칼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작업 도구는 딱 하나, 나무젓가락이다. 다른 모래 조각가들도 세밀하고 때론 선이 굵직한 작품 모두를 나무젓가락 하나로 빚어낸 걸 알고는 놀라워한다. 처음엔 손으로 모래를 빚었다. 그런 어느 날, 핫도그를 먹으며 모래조각을 구경하던 어린이가 자신 앞에 나무젓가락을 버렸다. 그걸 주어들고 모래조각을 해보니 빗살무니처럼 자연스런 곡선을 표현할 수 있더란다. 나무젓가락은 각이 있고, 연필처럼 그릴수도 있고. 깎아내고, 모래찌꺼기 제거도 가능했다. 그렇게 자신만의 조각칼과 조각기법을 창안했다. 양산천에서 모래조각 빚고파 그저 심심해서 만져 본 모래, 그게 조각으로 승화됐다. 땀 흘린 것만큼 명성을 얻었고 수고로움도 보상받는다. 그런 그이지만 소박한 바람 하나가 있다. 굳이 해운대 백사장까지 나갈 것 없이 양산에서 양산시민이 즐거워하는 모래조각을 하고 싶다. 모래를 8톤 덤프트럭 두 대분만 양산천에 부려주면 된단다. 양산천에도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고 유채축제, 삽량문화축전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연필 하나도 스스로 못 깎는 어린이들, 스마트폰 터치만 하고 놀아 엄지손가락만 발달한 아이들 감성을 일깨우고 손재주를 가르치고 싶다. 양산시에서 자신을 활용해주길 바라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 작품 준비 중 그는 하루 만에 다 끝나는 모래조각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습작으로 치부한다. 최소 1박 2일 정도는 심혈을 기울여야만 작품성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별주부전은 14박 15일 걸려 완성했다. 작품 소재를 구상하고 그 구상을 스케치 하는데도 꽤 많은 고민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작품화 할 계획이다.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모래 조각에 이야기를 입히고 싶어한다. 부조 같으면서도 환조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 다시 말해 벽화 같은 모래조각이 아니라 동상같은 모래조각품을 만들고 싶다. 그는 지금까지 1천250여점의 모래조각품을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모래 여인상’이다. 모래로 입술, 코, 눈 쌍커풀까지 이토록 세밀하게 표현했을까하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독학으로 이룬 모래조각, 가끔은 파도가 가져가고, 때로는 모래가 마르면 바람이 가져간다. 또 어떤 때는 바닷물에 작품이 스러진다. 그렇게 부질없는 모래조각, 하지만 그는 이번 주말도 모래가 있는 백사장으로 간다.
68세 나이로 한식조리기능사에 도전한 김순임(동면, 사진) 씨가 3개월 수강만으로 자격증을 한 번에 취득해 화제다. 김 씨는 지난 2월, 주변의 권유로 양산시여성복지센터 직업기술교육인 ‘한식조리기능사’ 강의를 수강하게 됐다. 나이가 많아 직업교육을 받아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평소 좋아하던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김의숙 강사님이 제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사님이 제게 ‘어머니는 연세가 있으시니까 다른 수강생이 문제 한 번 볼 때 열 번은 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식품학, 공중보건, 식품위생법, 조리원리 등 젊은 사람도 공부하기 어려운 이론 시험을 대비해 김 씨는 문제집을 보고 또 봤다. 일주일에 두 번, 여성복지센터에서 강의를 듣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하루 종일 문제집과 동고동락 한 것.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니까 엄청 힘들었죠. 강의는 3개월 만에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준비하니까 더 어렵기도 했고요” 이론과 실기 모두 한 번에 통과한 김 씨지만 위기는 있었다. 바로 시험장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종이에 문제를 풀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컴퓨터로 시험을 봐 당황했다. “컴퓨터는 만져보지도 않았는데 컴퓨터로 시험 치려고 하니까 더 떨리더라고요” 김 씨는 실기 시험을 볼 때도 부정행위를 할 뻔했다며 시험날을 떠올렸다. 김 씨 옆에서 시험을 보던 한 중년의 남자 수험생이 그에게 계속 어떻게 조리하는 거냐고 물었던 것이다. “강사님이 저한테 수시로 주의를 줬어요. 실기 시험 때 누가 옆에서 과정을 물어봐도 절대 알려주면 안 된다고요. 다행히 알려주지 않아 부정행위는 안 했죠” 김 씨는 자격증을 토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남은 인생도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저도 강좌를 수강하기 전까지 제 나이면 늦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도전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