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대상을 이와 같이 ‘절대적 결핍’에 처한 사람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시민 모두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일거리’를 발견하는 일은 너무 쉽다. 마을 도서관을 만들어 방과 후 아이들에게 학습과 놀이 공간을 제공하고, 필요에 따라 특별활동 등을 구
마음을 닦는 데 있어서 체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강렬한 체험일수록 그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기가 힘들다. 필자의 경우에는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재학 중, 방학이 되면 배낭에 간단한 생필품과 좌복을 챙겨 산장이나
대성암은 주지인 원진 스님이 수집해 소장한 전적들이 유명하다. 현재 보물 1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9점이 있다. 『감지금은니대방광불화엄경(紺紙金銀泥大方廣佛華嚴經)』(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90호),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보물 제1713호), 『지장보살본
어지간한 자각이 아닌 이상 신비한 경계를 체험하고 나면 이것이 수행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맹신하고 고집해 놓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작은 번뇌 하나 해결할 수 없는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는 수행이 익어가는
불안은 왜 생기는 것일까? 한마디로 결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가난, 질병, 전쟁, 아픔, 폭력 등은 불안이 가져다준 다른 이름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겪는, 겪을 일이다. 충만도 결핍이라는 탈을 쓰고 있을 뿐이다.
이를 위해서 선행해야 하는 것이 언어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意)한 대로 말(口)하고 행동(身)한다. 그 행동을 기반으로 현실 세계에 인(因)을 심고 그 인이 특정한 상황을 만나면(緣) 결과(果)로 나타나게 된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본대출 총액과 국민의 도덕적 해이만 강조하며 기본대출 제도의 위험을 강조하는 주장은 200조원만 부각하려 애쓴다.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방식과 똑같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기본대출은 이용자 스스로 재원을 마련한다. 그 재원은 사회적 연대에서 나온다. 민간 금융권으로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좌선 초반에 단전에만 집중하다 이후에 몸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 확장되면 전신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을 더 예민하게 느끼게 돼 그곳으로 의식이 급격히 쏠리게 된다. 이때 몸에서는 통증, 경련, 저림, 열기, 냉기 등 다양한 감각이 나타날 수 있다
현대 문명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탄소를 태우며 이룩한 결과물이다. 이미 지구는 다섯 차례 대 멸망을 겪었다. 운석 충돌, 화산 폭발, 빙하기 도래 등. 이제는 인류 자체가 멸망 위기에 놓인 셈이다.
실업을 해소하는 일은 최고의 복지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제도 혜택을 누리려면 우선 취업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제도는 사회보험(국민연금, 고용보험, 국민건강보험, 산업재해보험, 장기요양보험 등) 중심으로 짜여 있는데, 주로 취업자가 사회보험에 가입하기 때문이다. 일례
그러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현재, 우리 사회 학벌주의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필자는 학벌이 약화되고 있다는 이범(2020, 문재인 이후의 교육)의 문제의식에 크게 동의한다. 필자는 학벌이 약화되는 가운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매우 강하게 뿌리내렸다고 판단한다. 그에
둘째, 각국 연금수급을 위한 최소 가입 기간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양국의 가입 기간을 합산해 국가별 최소 가입 기간 이상이면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보장협정을 체결한 미국의 예를 들면, 협정 체결 전에는 미국 사회보장세를 9년 동안 납부하고 국민연금 보험료를
명상이나 참선은 자신의 팔자대로 업력대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이 쇠사슬을 끊기 위해 도전하는 마음의 혁명이다. 선천적으로 내게 주어진 상황이나 현실에 순종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과감히 떨치기 위해 삶과 죽음을 걸고 명상과 마음공부로 마음의 혁명에 동참하는 큰 결단이
유두절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후기 문인 김극기의 『김거사집(金居士集)』에 ‘동도(東都, 경주)의 옛풍속에 6월 보름날 동류수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들을 씻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계제(禊祭, 액운을 쫓는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데, 이를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한
명상 역시 ‘적적’과 ‘성성’이라는 이 두 상황을 중도(中道)에 맞게 유지해야 한다. 삼학(三學)에 비유한다면 정신수양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적적’으로, 사리연구로 대소유무와 시비이해가 밝게 분석되는 지혜를 ‘성성’으로, 작업취사로 모든 일에 정의는 취하
금봉암 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만난 산하동 계곡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성불암 갈림길이 나온다. 성불암 갈림길에서 왼쪽 노전암 대신 오른쪽 성불암 방향으로 걸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성불암 계곡을 만나게 된다. 계곡의 왼쪽은 공룡능선이고 오른쪽은 중앙능선이다. 계곡 따라
가난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야 누구나 바라는 것인데 그는 왜 ‘부하게도 마옵시고’라고 기도할까? 청빈하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도리라서 그런 것일까? 그렇진 않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소위 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 부자가 많았고, 그들이 부자가 된 것을 하나님의 은
명상으로 무언가 성취를 하려 한다면 이는 참 명상이 아니다. 시장에서 흥정하면서도 갖가지로 일어나는 감정의 발생을 즉각 바라보고 멈출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명상이 된다. 흔히 선가(禪家)에서 ‘평상심(平常心)이 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평상이 이러한 통찰의 방향
2009년 1월 와합은 한국에 도착했다. 어학원에 등록,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한국에서도 전액 장학금을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계획은 틀어졌다. 시리아와는 수교를 맺지 않아서 정부 장학금은 일체 받을 수 없었다. 각 대학 입학 사정을 알아보며 다녔지만, 실망
고정된 과녁에 대한 연습이 완전히 숙달된 뒤에야 자유자재로 뛰어다니는 사냥감을 쏘거나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쯤 돼야 때를 가리지 않고 선을 닦을 수 있는 ‘무시선’(無時禪)의 첫 단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