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진흥재단 부산지사(지사장 천원주)가 ‘지자체 해외 투자 유치와 지역 언론의 역할’이란 주제로 2014년 언론인 전문화 교육을 진행했다. 주간지와 일간지 등 전국에서 모두 11개 신문사 기자들이 참가한 이번 교육은 국내 경제자유구역과 중국(홍콩 포함) 경제특구 지역을 둘러보고 지자체별 해외 투자 유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됐다. 본지도 이번 교육에 참가해 국내 경제자유구역 3곳과 중국 4개 경제특구를 둘러보며 해외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양산지역에 필요한 내용을 고민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부산지사(지사장 천원주)가 ‘지자체 해외 투자 유치와 지역 언론의 역할’이란 주제로 2014년 언론인 전문화 교육을 진행했다. 주간지와 일간지 등 전국에서 모두 11개 신문사 기자들이 참가한 이번 교육은 국내 경제자유구역과 중국(홍콩 포함) 경제특구 지역을 둘러보고 지자체별 해외 투자 유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됐다. 본지도 이번 교육에 참가해 국내 경제자유구역 3곳과 중국 4개 경제특구를 둘러보며 해외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양산지역에 필요한 내용을 고민했다.
CFPJ(Centre de Formation et de Perfectionnement des Journalistes)는 말 그대로 ‘기자교육센터’다. 그러나 기자 지망생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기자생활을 몇 년 한 현직들이 재충전을 위해 또는 직장을 옮기려는 이들을 재교육시키는 대학원 급이다. 기자교육센터는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레지스탕스들에 의해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을 청산하고 올바른 언론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 센터 국제교류 담당자인 베르니끄 가레 씨는 “설립 이래 저널리즘 분야에서 프랑스 최상위급 학교로 자리매김해왔으며, 큰 언론사 최고책임자와 경영자들이 대부분 이곳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이 센터 복도에는 이곳 출신으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언론인들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립학교이지만 국가와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파리1대학과 자매결연으로 학부 과정 이후의 심화교육을 하고 있으며, 각 언론사가 주문하는 맞춤형 교육도 해주고 있다. 교수진은 500여명에 이르는데, 현직에서 일하고 있는 초빙교수가 많다고 한다. 이들이 해마다 2천여명의 기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등록금은 연간 5천유로이며, 교육 과정은 기본 2년이지만, 2~3일짜리 단기교육도 있고, 3개월, 6개월 과정 등 다양하다. 3~6개월 과정은 주로 현직 기자가 다른 언론사로 전직하려 할 때 이용한다. 예를 들어 문화부 기자 심화과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뭘까? 베르니끄 가레 씨는 “문화 분야에서도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 해당 분야별 지식은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는 잘 알지만 저널리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우리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신문과 인터넷 틈새 잡지 발행으로 공략 그에게 프랑스 언론 상황 전반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젊은 세대는 신문보다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뉴스를 접하기 때문에 프랑스에도 인터넷신문이 늘어나고 있지만, 수익모델은 아직 미미한 상태다. 뉴스 깊이나 질에서는 종이신문을 따라갈 수 없지만, 속보는 신문이 인터넷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인지 신문 판매는 줄어드는 대신 잡지 판매가 늘고 있다. 일간지는 지금 인터넷과 잡지 사이에 끼여 있는 형국이다” 주간지나 월간지의 경우 읽을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는데, 인터넷신문과 일간지가 다루지 못하는 틈새를 잡지가 공략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르 피가로와 르몽드, 르 파리지앵 등 주요 신문들은 시사와 여성 등 다양한 분야의 잡지 발행을 병행하고 있었다. 각 구청에서도 문화정보를 담은 월간잡지를 발행한다. 가레 씨는 “나도 20년 전까지 기자생활을 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디지털 시대에 대응한 구조조정과 기자조판 등 큰 변화가 이뤄져 왔다”며 “그 시절에 비해 지금 기자들은 1인 2역은 물론 1인 5역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잡지 시장에 대한 인상 이번에 방문하진 않았지만 고급일간지 <르몽드>가 영화감독 프랑수와 트뤼포 사망 30주년을 맞아 발행한 단행본이 눈길을 끌었다. 가판대나 서점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진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판매실적도 높은 것으로 보였다. 가격은 7.9유로로 페이지(122)에 비해 싼 것도 아니었다. 내용은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다양한 사진과 함께 묶은 내용이었다. 프랑스 최대 일간지로 78만부를 발행하는 지역신문 <우에스트 프랑스> 역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아 당시 전쟁 상황을 정리하고 참전 군인을 인터뷰 한 단행본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모든 신문사가 시사주간지와 패션, 여성, 음식, 부동산, 문화, 경제 등 전문분야 월간지, 수십종의 지역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었으며, 수백여종의 다양한 잡지가 가판대에 진열돼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전쟁과 역사 관련 잡지도 여럿이었다. 특히 거리 가판대 외에 모든 지하철이나 철도역 등 공중이용시설에 입점해 있는 ‘RELAY’라는 매점이 인상깊었다. 각종 잡지와 신문, 책, 음료, 스낵 종류를 구비하고 있는 이 매점에는 항상 사람이 북적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여행에 앞서 이 ‘RELAY’에 들러 자기가 읽을 책이나 잡지, 신문을 샀다. 물론 이런 매점과 가판대는 모두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사르코지 정부가 추진했던 인쇄매체 지원 정책 덕분이다. 따라서 프랑스 잡지 시장 확대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무리일 것 같다. 다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이나 트뤼포 사망 30주년 기념 단행본은 우리가 응용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전환기였던 ‘낙동강전투 70주년’을 책으로 묶어 내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에서 배운 것 프랑스 언론시장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정기구독자에게만 배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판대나 매점에서도 판매한다. 그러다 보니 1면은 대개 큼직한 사진 여러 장과 제목만으로 꾸며진다. 가판대에서 독자의 눈길을 끌어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신문이 그렇다. 1면에 비중 있는 기사 전문이 다 들어가는 우리나라 신문이 인덱스 중심으로 제작되는 유럽 신문의 비주얼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프랑스 신문에서 나름데로 배운 몇 가지는 첫째, 기자의 관심사가 아니라 독자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하라는 것이다. 프랑스 신문들은 이를 위해 독립된 부서를 두고 있다. 이 부서는 불특정 독자를 신문사로 초청해 의견을 청취하며 이를 편집국에 넘겨 지면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둘째, 어떤 사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독자 수준과 눈높이에 맞춰 기사를 쉽게 쓰라는 것이다. 교수에서 일반 시민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작문해야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과 동네 사람에게 밀착하고 특화된 콘텐츠를 발굴해야 하며 종이신문과 인터넷신문 독자층을 달리하는 기사를 출고하라는 것이다. 프랑스 신문 역시 독자는 날로 줄어들고 젊은층은 인터넷 활용도가 높고 그 틈새를 잡지가 공략하는 형국이라 언론사들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언론사 기자들이 현장을 떠나야 했으며 경영진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지면개선, 독자의견 수렴, 주간지와 잡지 발행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관호 기자 hohan1210@ysnews.co.kr
르 파지리앵(Le Parisien)은 프랑스 수도 파리를 배포권역으로 하는 지역일간지다. 그러나 전국을 배포권역으로 하는 ‘오주르뒤 엉 프랑스’(Aujourd’hui en Fr ance)도 함께 발행하고 있다. 지역일간지가 주력매체이고, 전국일간지가 자매지인 특이한 신문사다. 현재 350명의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본사에 200명, 파리 주변 지역에 150명이 상주한다. 이들 외에도 50명 정도가 전국에 상주하고 있으며, 30명 정도의 해외특파원을 두고 있다. 새벽 2시까지 일어나는 일들을 신문에 담는다. 기자들은 종이신문에도 출고하지만, 웹 사이트에도 출고한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발행되는 신문 가운데 가장 많은 43만부가량을 발행하고 있으며, 르몽드가 정치ㆍ사회분야 고급지를 지향한다면 르 파리지앵은 범위가 넓은 대중지를 지향하고 있다. 또 매주 금요일 주간잡지를 발행하고 매일 광고지를 특별판으로 제작해 본지와 함께 판매하고 있다. 르 파리지앵은 1유로 10센트, 르몽드는 2유로 이상에 판매한다. 그러나 르 파리지앵은 적자다. 다만 인터넷 매출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5년 전까지만 해도 50만부를 판매했지만, 7만부가 줄었다. 인터넷 접속자와 합치면 350만명 정도다. |인터넷과 종이신문, 독자층 달리 해 자신을 ‘행정편집국장’이라 소개한 자끄 랄랑(Jacques Lallain) 씨는 “인터넷 유료화를 추진하고 있다”며 “어떤 층이 뭘 보느냐를 조사해보니 웹 사이트는 평균 연령 35세 미만, 종이는 평균 60세였다. 연령대에 따라 서로 선호하는 콘텐츠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웹 사이트 콘텐츠는 평균 연령 35세에 맞춰 출고하고, 종이신문은 질을 높여서 고급화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화부장 이브 재글(Yves Jaegle) 씨는 “이제 기자들은 종이신문 기사를 쓰기 전에 인터넷에 먼저 쓴다”며 “예를 들어 인터넷은 젊은 층이 주로 구독하기 때문에 유명 가수 콘서트는 축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처럼 라이브 블로깅(블로그나 SNS로 실시간 보도)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독자 겨냥한 이벤트 ‘눈길’ 이브 재글(Yves Jaegle) 문화부장은 “문화부에서 전에는 없었던 것을 만들어 냈다. 가수가 새 음반이 나오면 그냥 인터뷰 기사만 냈다. 그러나 이제는 가수를 회사에 불러서 노래 3~4곡을 부르게 하고, 이걸 찍어서 사이트에 올린다. 어려운 일인데, 우리 기자 가운데 한 명이 음악계 인사와 두터운 관계여서 섭외가 가능했다. 가수들도 음반 판매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서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놀이기구를 큰 공터에 설치해서 시민이 즐길 수 있게 해놓은 곳이 있다. 이번에 새로운 놀이기구가 나와서 기자가 직접 타보고 그걸 자신이 촬영해 비명 소리까지 영상에 담았다. 요즘 독자가 기자에게 원하는 것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인 것 같다”며 르 파리지앵의 변화를 강조했다. |기사 쉽게, 독자가 친밀감을 느끼도록 이브 재글 부장은 “우리는 지식인부터 일반 시민까지를 대상으로 하므로 영화를 설명할 때도 구독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기사를 쉽게 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문화부 기사의 잘못된 점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마치 전문성을 가진 문화부 기자에게 설명하듯 독자 이해도가 떨어지는 기사를 많이 썼다. 르 파리지앵의 철칙은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문화 관련 기사 마지막에는 반드시 독자 생각과 의견을 넣는다. 현장에서 5명의 관객을 붙잡고 당신은 이 공연을 어떻게 봤느냐, 관람료가 아깝지 않으냐는 등 질문을 하고 이를 지면에 반영한다. |영화와 방송도 문화다 그들은 프랑스 신문의 문화면이 수많은 공연과 행사, 전시의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는 주당 근로시간이 35시간이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많고, 파리는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전시와 공연 등 콘텐츠가 엄청나게 많다. 르 파리지앵은 시민에게 문화 가이드 역할을 해 시민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문화성 있는 기사로 유명한 사람을 인터뷰해 유명인의 잘 몰랐던 면을 부각하는 기사를 쓴다. 한 판사가 있는데 그가 락(Rock) 음악을 좋아 한다든지,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큰 기업의 사장을 인터뷰하는 기사도 쓴다. 매달 독자와 만남에서 이런 기사들이 호평을 받아 매주 일요일에 이런 인터뷰를 출고하고 있다. 대중지를 추구하는 르 파리지앵은 영화와 음악, 방송을 많이 다룬다. 프랑스에서도 연극과 전시는 비대중적인 분야에 속해 18명의 문화부 기자 가운데 5명이 방송분야 취재에 투입된다. 자매지로 발행하는 ‘르 파리지앵’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여기에도 문화부에서 콘텐츠를 제공한다. |문화 15개 분야 최고를 뽑아 시상 문화 분야의 최고를 뽑아 상을 주는 행사도 지난해부터 시작했다. 20013년도에 ‘스타’라고 이름 붙여 15개 부문에서 상을 주고 있다. 재정 등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행사가 성황을 이루려면 유명 연예인이 와야 하는데, 다행히 음악분야는 유명 가수가 와서 상을 받았고 영화감독과 주연 배우가 직접 시상도 했다. 소설 분야 수상자는 수상 사실을 인쇄해 책 띠지를 만들어 판매에 큰 도움을 줬다. 신문사 경영에 경제 가치를 따질 수 는 없지만 신문사 브랜드 제고에는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각 분야 수상자 선정은 신문사 350명의 기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로 뽑는다. 수상자는 르 파리지앵 기자들이 뽑은 스타인 셈이다. |독자가 신문사 주인이다 르 파리지앵도 독자 관심을 파악하기 위해 매달 독자와 만남 행사를 열고 있다. 영업부에서 본사로 초청할 독자를 10명씩 선정하는데, 신문 판매 현장에서 독자를 섭외한다. 독자와 만남 진행 방식은 해당 날짜의 신문을 펴 놓고 각 지면과 기사, 사진과 제목 등에 하나하나 의견을 묻는 식이다. 이것을 마케팅부 직원이 모두 녹음한다. 왜 이 사진을 여기에 실었나, 기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등 의견을 받아 취재, 편집 등 신문사 모든 종사자가 공유한다. 르 파리지앵도 독자를 신문사 주인으로 섬긴다. 한관호 기자 hohan1210@ysnews.co.kr
한국언론진흥재단 대구사무소는 지역신문 경쟁력 강화를 위해 프랑스 지역신문 문화콘텐츠를 알아보는 디플로마를 실시했다. 6월 15일부터 22일까지 전국 지역신문 언론인 10명은 프랑스 지역신문이 어떤 콘텐츠로 독자와 소통하고 있으며 실상은 어떤지를 현지 취재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대구사무소는 지역신문 경쟁력 강화를 위해 프랑스 지역신문 문화콘텐츠를 알아보는 디플로마를 실시했다. 6월 15일부터 22일까지 전국 지역신문 언론인 10명은 프랑스 현지 취재를 했다. 프랑스 지역신문은 어떤 콘텐츠로 독자와 소통하고 있으며 실상은 어떤지를 취재했다.
95년 전 3.1 독립운동의 열풍이 전국을 뒤덮던 시절 양산의 항일 투쟁도 실로 치열했다. 수 백 명의 군중이 목놓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무수한 인원이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일제치하 양산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오늘날 다시금 광복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윤현진ㆍ서병희 선생 ‘경남도사(道史)’에도 실려 있는 윤현진 선생은 양산지역 항일 운동의 대표 인물이다. 1892년 소토리에서 태어나 17세 소년의 몸으로 항일 독립 전선에 뛰어들어 30세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윤현진 선생은 1919년 4월 11일 안창호, 이동휘, 김구, 김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 핵심인물로 참가했으며,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역임했다. 이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등 왕성한 활약을 펼치다 1921년 9월 17일 당시 서른의 나이로 중국 상해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65년 선생의 유해를 봉환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서병희 선생은 1867년 상북면 좌삼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서울로 올라가 왕산 허위(許爲)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군사훈련과 의병활동을 함께했고, 그해 겨울 전국 13도 창의군이 결성됐을 때 총대장 이인영 휘하에 허위가 군사장(軍師長)으로 발탁됐다. 서병희 선생이 이끄는 부대는 2년간에 걸쳐 체포될 때까지 끊임없이 전투를 하면서 일본 수비대를 괴롭혔다. 1990년 정부는 서병희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상환ㆍ김철수 선생 1897년 4월 17일 양산 동면에서 태어난 이상환 선생은 지역청년회 활동으로 청년들에게 민족의식과 반일감정을 불어넣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 선생은 청년회 간부들과 만세시위를 계획,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에 맞춰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 오후 2시 2차 거사에서 시가행진을 하던 끝에 현장에서 체포돼 1919년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6월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895년 5월 4일 상북면 상삼리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철수 선생은 재동경 유학생의 독립운동기구인 ‘조선청년독립단’의 11명 대표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돼 2ㆍ8독립선언식을 주도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당시 일제가 국내 유명 인사들을 위협 또는 회유해 소위 황민화운동에 앞장 설 것을 강요하자 그는 끝내 이를 거부하고 산중에 은거하다 1945년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윤복이ㆍ김말복 선생 윤복이 선생은 1884년 1월 원동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1년 양산농민조합이 결성되자 조합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농민조합원이 일경에게 구속 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복부관통상을 입고 다음날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윤복이 선생의 공훈을 기리며 1986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말복 선생은 1909년 하북에서 태어나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항일독립 사상과 민족의식 고취 등 애국 인재를 양성하는 데 전력하고, 일제의 내선일체 강요의 부당성과 허구성을 비판하다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문영ㆍ안덕원 선생 동면 법기리에서 태어난 박문영 선생은 대구서문교회 장로시절인 3월 8일 대구독립만세 시위운동 당시 대구시장 부근에 집합한 군중과 함께 체포됐다.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른 후 기독교 신도들과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 고취 교육, 일본 신사 불참배 등으로 일경의 감시를 받아오다 광복을 목전에 둔 1943년 순국했다. 이에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안덕원 선생은 산막리에서 태어나 1919년 당시 22세의 청년으로서 이상환 선생이 주도한 양산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해 군중을 선동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혔다. 부산 헌병대로 이송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의 형을 받았다.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으나, 여독으로 앓다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은 보지 못한 채 1922년 8월 23일 25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1992년 안덕원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이 밖에도 양산향토사연구회에 따르면 김상헌, 이석윤, 서장주, 조병구, 김외득 등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라있는 양산지역 인사들은 현재 모두 39명에 이른다. 장정욱 기자 cju@ysnews.co.kr
사상체질이란 조선 말기 한의학자인 이제마(李濟馬, 1836∼1900) 선생이 동의수세보원에 기록한 내용으로, 인간의 체질을 태양인과 태음인, 소양인과 소음인의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체질은 본래 가지고 태어난 신체적인 특징과 정신적인 특징,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특성을 지닌 개념인데, 확률적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한쪽 체질에만 완벽하게 속하는 것은 아니며, 후천적으로 개선할 수도 있다고 한다. ● 태양인 특징 목덜미가 굵고 실하며 머리가 크다. 가슴 윗부분이 발달하였다. 이마가 넓다. 인상이 강하고 빛나는 눈매. 엉덩이가 작다. 용모가 뚜렷하고, 살이 비후하지 않다. 하체가 약해 오랫동안 서 있거나 걷기가 힘들고, 다리가 위축돼 서 있는 자세가 불안하다. 선천적으로 폐가 강하고, 간이 약해 상체가 발달한 경우가 많고, 살이 찌게 될 경우 상체가 비대해 보일 수 있다. 성격 움직임이 좋고 주장이 센 편이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땐 화를 자주 내는 성향이 있다. 식습관 태양인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약하고, 양성체질이어서 열이 많은 체질. 선천적으로 폐가 강하고 간이 약함. 몸에 열이 많기 때문에 시원한 음식을 먹고, 육식을 싫어하는 식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좋은 음식 미역, 다시마, 배추, 조개류 ● 태음인 특징 목덜미의 기세가 약하다. 허리 부위의 형세가 성장해 서 있는 자세가 굳건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 코가 발달했다. 넙적한 얼굴. 간혹 수척한 사람도 있으나 골격만은 건실하다. 살이 찌고 체격이 건실한 편이며 배가 나왔다. 가슴, 어깨가 빈약하다. 폐가 약하다. 성격 보수적이어서 변화를 싫어한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과감히 결단하는 편이며 조심성이 있다.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식습관 따뜻한 음식과 육식을 주로 먹는다. 좋은 음식 녹용, 칡, 오미자차, 도라지, 맥문동, 율무차. 단, 변비가 있는 사람은 율무를 피하는 것이 좋다. ● 소양인 특성 돌출형 이마, 올라간 눈매, 날렵한 턱선, 말하는 모습이나 몸가짐이 민첩해서 경솔하게 보일 수 있다. 엉덩이 부위가 빈약해 앉은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가슴부위가 성장해 충실하다. 하체가 가볍다. 입술이 얇다. 방광이나 자궁질환이 많은 편이다. 상체비만. 성격 걸을 때는 항상 먼 곳을 보고 걷고, 얼굴 모습은 머리가 앞뒤로 나오거나 둥근 사람이 많으며, 표정이 밝은 사람이며 미인형이 많은 체질이다. 소양인은 행동거지가 외향적이며 명랑하고 재치가 있기에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대인관계는 원만하나,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다정다감하고 봉사와 희생정신이 있어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다. 신경은 대체로 예민하지만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풀리는 성향이다. 땀은 많지 않으며 시각이 특히 발달돼 있다. 식습관 몸에 열이 많기 때문에 더운 음식보단 찬 음식을 좋아한다. 소화력이 왕성하다. 음식을 빨리 먹는 경향이 있다. 좋은 음식 우슬, 독활, 속단(허리관절 강화) ● 소음인 특성 앞으로 수그린 모습으로 걷는 사람이 많다. 엉덩이가 크다. 가슴둘레를 싸고 있는 자세가 외롭게 보이고 약하다. 전체적으로 체격이 작고 말랐으며, 약한 체형이다. 성격 소음인은 손발이 갸름하고 차가운 편이다. 대부분 예민하고, 행동거지가 매사에 꼼꼼하고 착실하다. 판단력이 빠르고, 사색적이며, 치밀하고 세심해 실수가 적으나 행동력과 표현력이 부족한 편이다. 내성적이고 자기 본위적이어서 계산적이다. 질투심, 시기심이 많다.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기 싫어한다. 식습관 보통 허약체질이다. 소화기가 약해서 음식을 가려먹는 경우가 많다. 소음인은 몸이 찬 체질이어서 추위를 잘 타기에 차가운 음식보다는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 차가운 성질의 음식은 피해야 한다. 돼지고기, 녹두음식, 밀가루 음식, 풋과일 등이 있다. 좋은 음식 인삼, 부자, 계피, 백출(따뜻한 기운의 약재), 숙홍(음기를 보호해줌), 자극적인 음식보다 담백하고 싱거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냥 커피가 좋았어요. 커피숍을 하겠다는 생각은 10년도 훨씬 넘었죠. 7년 정도 보험설계사 일을 하다가 결국 욕심을 냈죠. 더 늦으면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윤진 씨가 커피전문점을 시작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물론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커피에 대한 사랑이 더 컸다. 10여 년 동안 꿈꿔오던 일이기에 더 늦기 전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씨는 바리스타 교육을 전문 과정을 통해 배우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을 통해 커피 전문가를 알게 됐고, 그로부터 알음알음 배워가며 커피에 빠져들었다. 가게를 시작했지만 위치가 좋지 않다 보니 손님을 모으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달리 홍보의 방법도 없었다. 그냥 오는 손님에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대하는 방법 뿐. 이 씨는 매일 오전 8시에 가게 문을 열어 밤 11시까지 혼자서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명절을 제외하고 만 2년 동안 하루도 쉰 적 없다. 그렇지만 이 씨는 일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장사가 잘돼서 솔직히 힘든 줄 모르겠어요. 단골들이 많이 늘어나고 그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어요” 좋은 원두를 사용하고, 자신이 먼저 먹어보고, 싱싱한 과일을 통해 맛있는 제품만 내놓기 위해 노력하는 이 씨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저도 꿈이 있지요. 양산지역에 2개 정도 체인점을 내는 꿈이요. 남들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꿈일지도 모르지만 전 오래전부터 염원하던 일이에요. 머지않아 그 꿈도 이뤄질 것이라 믿고 있어요” 장정욱 기자
자고로 장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가게를 열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녀야 당연히 가게를 들고나는 손님 또한 많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세권이라 불리는 지하철역 근처나 대형할인점 주변, 아파트 단지 인근 등의 가게들이 비싼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특히 커피전문점의 경우 ‘쉬었다 가는 공간’이라는 특성상 유동인구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윤진(46) 씨가 운영하는 커피전문점 ‘애슐리’는 이러한 공식을 과감하게 깨뜨렸다. 물금읍 범어리 남양산회센터 건물 1층, 그것도 도로변이 아닌 공원 방향 건물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철도 2호선 남양산역과 가깝긴 하지만 남양산역은 위치상 역세권이라 부를 수 없는 곳이다. 아직 유동인구도 적고 근처에 아파트단지나 상권은커녕 계획된 택지개발마저 덜 이뤄진 곳이기 때문이다. 실내장식에도 ‘여유’ 공간은 필수 그런데도 이 씨가 이런 장소에 커피전문점을 시작한 이유는 많은 유동인구 대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은 곳이 장사가 잘되는 곳이란 기존 개념을 깨고 사람들이 드문, 복잡하지 않은 공간을 선택한 ‘역발상’의 결과다. “처음부터 대로변이나 복잡한 시내 지역에서 커피전문점을 시작할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위치보다는 커피숍의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머리를 식히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거든요” 결국 이 씨가 선택한 것은 많은 유동인구 대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이 씨의 생각은 가게 실내장식 구성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 씨는 테이블 수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사이 공간은 넓게 했다. 대신 줄어든 테이블 수를 늘리기 위해 높은 천정을 활용해 2층을 만들었다. 2층 공간은 테이블 수를 늘리는데도 도움이 됐지만, 무엇보다 ‘여유’를 갖기에 적합했다. “손님들이 2층 공간을 많이 좋아하세요. 제가 실내장식 할 당시에 2층을 ‘다락방’처럼 꾸미고 싶었거든요. 2층은 다른 손님들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주인인 저도 잘 보이지 않아 손님들이 자신만의 공간으로 느끼시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오래 머무르다 가시는 손님들이 많죠. 그만큼 편하게 생각하시는 거고, 제 생각이 적중했다고 봅니다” 건물주도 실패 예상 임대 안 주려 처음에 이 씨가 현재 자리에 커피전문점을 열겠다고 했을 때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심지어 장사가 안될 것이라며 건물 주인마저 임대를 주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이 씨의 가게는 성공이 불투명해 보였다. 하지만 ‘차 한 잔의 여유’라는 표현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씨의 판단은 적중했다. 지난해 2월 가게 문을 열 당시에는 33㎡ 남짓 작은 공간이 현재 약 100㎡까지 커졌다. 가게를 시작하고 6개월 만의 일이다. 물론 장사가 폭발적으로 잘 돼서 가게를 넓힌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워낙 좁은 공간인데다 이 씨가 ‘여유’를 추구하다 보니 적은 손님마저 수용하기 힘들었다. 결국, 이 씨는 나름 위험을 각오하고 가게를 확장했다. 확장하는데 1억원 가까이 들었다. 처음 가게 문을 열 당시 실내장식 비용으로 4천500만원쯤 들었다고 하니 확장하는데 창업비의 두 배 이상을 지출한 것이다. 이 씨가 “사실상 모험에 가까운 투자였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넓어진 공간만큼 손님들도 많아졌다. 이 씨가 생각했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커피숍’ 분위기도 더욱 연출할 수 있었다. 확장하고 4개월쯤 지나자 매출도 오르기 시작했다. 이 씨 가게의 특징은 단골이 많다는 점이다. 입소문을 통해 처음 찾아온 손님들이 두 번 세 번 가게를 방문하며 단골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40~50대 손님이 많다. 주중에 업무상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이 많이 찾는 것이다. 이 역시 시끄럽지 않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애슐리의 특징 때문이다. 물론 주말에는 젊은 연인들이 찾아와 여유를 즐기고 있지만. 가게 한쪽 내 주며 이웃과도 ‘공생’ 단골이 많다 보니 손님 입맛에 맞춰 커피를 내놓는 것도 특징이다. 40~50대 손님들에게 어려운 이름의 커피보다는 ‘어떤 맛, 어떤 향’ 등 각 커피의 특징을 설명해 손님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직 40~50대 손님들은 커피 맛에 그리 익숙하지 않아요. 커피 이름도 그분들에겐 복잡하기만 하고요. 그래서 맛이나 향을 설명해 손님들이 선택하도록 하죠” 애슐리는 부가상품으로 머리핀과 머리띠 등의 액세서리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액세서리 판매 수익은 이 씨의 몫이 아니다. 과거 자신이 공방을 하며 만난 이웃에게 자리만 내어줬기 때문이다. 이 씨는 “액세서리는 가게를 찾은 손님들에게 작게나마 눈요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이웃에게는 판매 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 좋다”고 설명했다. ‘바리스타(barista)’를 꿈꾸는 학생에게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가게 한쪽에 공간을 마련해 드립(drip) 기구를 갖춰놓고 연습할 수 있게 했다. 도구뿐만 아니라 재료도 이 씨가 제공한다. 결국 이 씨는 애슐리를 통해 작게나마 이웃과 함께하며 ‘공생’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모두가 탐내는 ‘중심’을 벗어나 한적하고 여유로운, 커피 본연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곳을 선택한 애슐리. 창문에 새겨진 ‘커피가 예쁘다’는 글귀처럼 예쁜 커피와 예쁜 사람들이 예쁜 만남을 갖는 이곳 애슐리에서는 오늘도 ‘커피 한 잔의 여유’가 피어나고 있다. 장정욱 기자 cju@ysnews.co.kr
한해 동안 우리 고장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2008년 양산시가 편찬한 <양산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사진첩을 바탕으로 근대 이후 시민의 사는 모습과 주변의 풍광이 바뀌어 온 것들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는 자리였다. 돌이켜 보면 양산은 조국의 근대화와 발걸음을 같이해 온 발전의 역사였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1차 산업인 농업에 의존한 조용한 시골에 불과했다. 인근의 김해나 동래와 달리 경남도 내에서도 변방으로 군세(郡勢)가 크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야심작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의 영향으로 산업도시로의 변환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역점시책의 하나였던 울산중화학공업단지와 역사도시 경주를 경유하기 위해 고속도로 노선이 밀양 방향이 아닌 양산, 언양 방향으로 설계가 이루어지면서 산업도시의 핵심 인프라인 도로 교통망의 확충이 가능했던 것이다. 1972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서서히 잠재력을 드러내던 양산은 1980년대 초까지 대도시 공장의 이전이 진행되면서 공단 조성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수백만평의 광활한 농토인 메기들(당시 양산읍과 동면 삼산지구, 물금 범어ㆍ증산 앞 들판을 가리킨다)을 중심으로 신도시 건설사업이 추진되고 산막, 어곡 등지에 새로운 공장부지가 대규모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73년 당시 양산보다 규모가 더 컸던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통폐합되면서 기장을 비롯해 일광, 장안, 서생면지역까지 규모를 키운 양산군은 1990년대까지 고속성장을 계속해오다 1996년 드디어 시로 승격하게 된다. 신도시의 등장은 부산도시철도 2호선의 양산연장 개통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게 했다. 범어 앞 들판에 부산대학교 의대캠퍼스와 병원단지가 위용을 드러내면서 이제는 의료복합도시로서 기능을 보태고 있다. 이렇듯 도시의 외형적 성장은 실로 눈부시지만, 그에 따른 환경문제와 시민의 삶의 질 문제가 늘 시대의 이슈로 대두돼왔다. 경남도내에서도 가장 많은 골프장 등 난개발에 가까운 녹지의 대규모 훼손은 주변에 사는 주민들의 환경 관련 민원의 원인이 됐다. 최근에는 공업지역 내에서도 공해유발업종에 대한 반대 민원으로 소송까지 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으며, 대규모 산업단지 건설사업 추진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항시 도시개발과 환경보존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어느 한쪽이 영원히 우위에 서지는 못하고 있음이 진리다. 신도시만 하더라도 번영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옥답의 들판이 사라지고 택지로 둔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다. 우리의 옛 추억 하나가 사라져 가는 장면에서 인지상정처럼 느끼는 소회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인류 발전의 역사는 그렇게 늘 무언가를 댓가로 치러야 하는 법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신도시의 모습을 보면서 어차피 옛 것을 움켜쥐고 답습하던 세월이 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 시민이 잘 사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따름이다. 그동안 사진자료 정리를 도와주신 양산시 공보담당관실 안정현 씨에게도 감사드리며,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양산시 사진제공
90년 뉴델리 무역관에 근무할 때 인도 직원 다난조이가 히말라야의 뜻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다난조이는 Himalaya 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며 him 또는 hima는 눈(snow), alaya는 집(house) 또는 거주지(abode)라고 한다. 따라서 ‘히말라야’는 ‘눈+집’의 뜻을 가진다고 설명하면서 ‘히말라야’ 또는 ‘히말라이’가 함께 쓰인다고 했다. 힌디의 경우 단어 끝의 자음은 모음 a 없이 발음되므로, 히말라야(himalaya)의 ya는 y만 발음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히말라이는 눈덮인 산인데 왜 ‘눈+산’이라고 하지 않고 ‘눈+집’이라고 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당시 델리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전공하고 있던 임근동과 이재숙, 그리고 이윤정, 이은구 등 후배들에게 히말라이가 ‘힘+알라야’가 아니고 ‘힘+말라야’ 또는 ‘히+말라야’가 맞는 말이 아닌가 하고 질문해 봤다. 왜냐하면 힌디에서 산은 ‘말라이’ 라고 하기 때문이었다. 후배들은 힌디 조어법의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힘+알라야’ 즉, ‘눈+집’이 맞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도 몇몇 힌디 전공 교수들에게 질문해 보아도 답은 같았다. 모두들 문법에 근거해서 설명하니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그래도 ‘힘+말라야’ 즉 ‘눈+산’이 인간의, 특히 원시인의 사고방식에 자연스럽다는 혼자만의 생각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힌디로는 산을 ‘말라이’라고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 원시시대로 가보자. 원시인들이 산을 보면 ‘말라이’라고 처음 지칭했다면, 히말라야 산을 만나도 ‘말라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단지 다른 산과는 달리 눈이 덮혀 있으니까 ‘눈산’(흰산)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리라고 생각했으나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의 의문을 푸는 계기가 왔다. 96년 10월에 남인도 첸나이 무역관장으로 근무하던 중 ‘히말라이’를 타밀어로는 ‘이마야 말라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이마야’는 눈(snow)을 뜻하고 ‘말라이’는 산(mountain)을 뜻하므로 ‘이마야말라이’는 ‘눈산’을 의미한다. 타밀어의 ‘이마야(imaya)’는 hima에서 h가 탈락한 것이다. 같은 인도내에서 북인도인은 눈집, 남인도인은 눈산이라고 다르게 부른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문법에 의거해 ‘눈집’이라고 설명하는 것 보다는 보이는 현상 그대로 ‘눈산’이라는 부르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더욱이 네팔에서는 눈 덮인 산, 즉, ‘눈산’을 ‘히말’(himal)이라고 한다. ‘힘(him)+말(mal)’에서 m 하나가 탈락, 아니면 ‘히+말’로 볼 수 있다. 또한 말라이(malai)에서 ai가 탈락하여 mal 만 남았다. 중요한 것은 네팔에서도 ‘눈+집’이 아니고 ‘눈+산’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네팔에서 부르는 산의 이름을 보면 안나뿌르나 히말, 마나슬루 히말, 가네시 히말 등이 있다. 눈은 하얗기 때문에 우리말의 ‘희다’라는 단어의 ‘히’(hi)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우리말의 밝은 색을 뜻하는 ‘해’(태양)도 연상됐다. 그래서 힌디에서 him, hima의 다른 뜻을 찾아보니 차다(cold), 희다(white), 서리(frost), 얼음(ice)의 뜻도 함께 쓰이고 있었다. him 에 희다(white)는 뜻이 있으므로 ‘눈산’은 ‘흰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이아몬드를 힌디로 히라(hira) 라고 하므로 우리말이나 인도어, 네팔어 모두 ‘흰색’과 관련된 단어에는 ‘히’(hi) 또는 ‘힘’(him)이 공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산을 뜻하는 ‘말라이’에 대해 살펴보자. 산은 높으므로 시간 흐름에 따라 높을 고, 사람에서 가장 높은 부분인 머리, 또 의미상으로 최고나 첫째의 뜻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 말 중에 ‘산마루’라는 단어에서 마루는 높은 곳을 의미하고, 종가(宗家)집 할 때 종의 훈과 음은 ‘마루 종’ 이다. 여기서 ‘마루’는 최고, 최초, 높다는 뜻을 가진다. 山(산)은 ‘뫼 산’ 으로 읽힌다. 또한 고려중기 언어에서는 高(높을 고)를 ‘모라’라고 발음했다고 한다. 우리말 머리카락(hair)은 타밀어로 ‘무리, 머리(mudi)라 한다. 타밀어는 d를 r과 가깝게 발음하므로 무리, 머리로 발음된다. 우리말 머리가 타밀어 머리와 뜻과 음이 같다는 말이다. 우리말 산은 타밀어로 말라이, 힌디로도 말라이라고 한다. 타밀어로 나이가 가장 많다는 뜻을 mootha, mud, mut으로 표현하며 mudi라고도 한다. 우리가 ‘첫째’아들을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뫼 산(山), 모라 고(高), 머리 두(頭) 에서 우리말과 인도어가 다같이 ma, mo, mal의 어소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히말라이는 우리말로는 눈집보다는 눈산 또는 흰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흰산’을 한자화 해보면 ‘흰 백(白)’ ‘뫼 산(山), 즉 白山(백산)의 가능성이 있다. 또한 ‘흰마루’, ‘흰머리’, ‘흰뫼’가 후에 마루, 머리, 뫼라는 산(山)의 뜻 뒤에 또 다시 산(山)이 추가된 것이라면 ‘흰마루산’, ‘흰머리산’이 되므로 한자로 전환시 ‘흰白+머리頭+뫼山’의 白頭山(백두산)과 연계할 수 있고, 또는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으로 마루山, 머리山이 될 가능성도 있다. 강화도의 마니산이 마리산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메기의 성분은 수분, 단백질, 지방, 칼슘, 인, 비타민이 풍부하며 철분이 다량으로 함유돼 있다. 메기 고기는 맛이 좋아 널리 식용으로 애용되고 있다. 메기는 붕어나 피라미와 달리 민물고기의 비린내도 거의 나지 않으며 영양도 매우 높고 저칼로리 고단백 식품으로 비만을 예방할 수 있는 식품이다. 메기의 효능 산모가 아기를 낳은 후에 젖이 부족할 때 달걀을 넣고 함께 끓여서 장복하면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질과 치질로 인해서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경우 파를 넣고 메기를 달여 먹으면 개선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메기는 힘이 좋아서 허약해진 기운을 보하고 정력을 증진시켜 주는 좋은 효과가 있다. 메기의 효능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주로 고아서 달여 먹으면 좋다고 한다. 수종을 다스리고 이뇨를 도와준다. 복막염, 부종에 효과가 있다. 당뇨병 환자에게 최적 식품인 메기간을 먹으면 좋고 조갈증에도 효험이 있다. 메기의 독침은 목이 몹시 타고 갈증이 심한 증세에 달여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몸이 약해 코피를 자주 흘리고 얼굴이 검고 소변을 자주 보는 어린이나 노인들의 허약체질에 좋다. 메기와 궁합이 맞지 않는 식품 메기를 멧돼지 고기와 함께 먹으면 심한 설사를 하는 토사를 발한다고 하며, 쇠간과 함께 먹으면 풍병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또한 꿩고기와도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같이 먹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가물치 효능 부종 및 만성신장염 개선 가물치를 먹으면 이뇨작용을 활발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부종 개선에 도움이 되며, 만성신장염을 앓는 분들의 부종을 없애주고 보신용으로 가물치국을 끓여 먹으면 좋다. 특히, 만성신장염이 있는 분이라면 가물치에 파뿌리를 넣고서 곰탕을 끓여 먹으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치질 치료 치질치료에도 가물치의 효능이 있는데 가물치의 내장을 불에 구워 항문에 발라주면 치질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모유촉진 및 혈허증 임산부가 출산 후에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에는 가물치를 푹 고아서 즙을 먹이면 젖이 잘 나온다고 해서 산후 몸조리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또한, 산모의 혈을 보하고, 여성의 혈허증에도 좋아 가물치를 푹 고아서 곰국으로 만들어 먹으면 좋다. 급성 인후염 개선 급성 인후염이 있는 분이라면 가물치 쓸개를 통증이 있는 부위에 조금씩 발라주면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피로회복 및 체력향상 가물치에는 철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피로를 효율적으로 제거해주고 체력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가물치와 궁합이 잘 맞는 식품 궁합이 잘맞는 식품으로는 회향, 마늘, 미나리, 도라지, 황기, 당귀, 생강, 동아, 파뿌리, 구기자, 백봉령, 진피, 호박, 작약, 산수유 등이 있다. 그러나 가물치의 체내(體內) 또는 입안에는 악구충(鄂口蟲)이라는 기생충이 있으므로 회로 먹는 것은 좋지 않으며, 악구충에 감염되면 까닭없이 피곤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가물치처방 1. 여성의 혈허에는 가물치를 구어서 가루내어 먹는다. 2. 하초가 허할 때는 회향(회향풀열매)과 함께 고아서 먹는다. 3. 복수(배에 물이 차는 증상)에는 내장을 꺼내고 마늘을 넣고 진흙으로 싸서 구워 먹는다. 4. 간경변증으로 배에 물이 차고 붓는 데는 가물치(여어) 뱃속에 미나리(마늘도 좋다) 한줌을 넣고 끓여서 먹는다. 이약은 강한 이뇨작용, 부은 것을 내리는 작용이 있다. 5. 출산 후 몸이 부을 때는 가물치국을 끓여 먹는다. 산후 부종에는 가물치에 도라지 두줌 정도를 넣고 국을 끓여 먹는다. 6. 산후 조리에는 가물치와 황기 각 40g, 당귀 8g, 생강 4쪽을 푹 고아 식후 2번(1마리당 4~5일) 3마리 정도 먹는다. 7. 가물치 쓸개는 단맛이 나는데 인두염에는 쓸개즙을 내어 목구멍 언저리에 떨어뜨린다. 8. 만성 신장염에는 동아와 파뿌리를 넣어 곰국을 끓여 먹는다. 9. 치질에는 가물치 내장을 구워서 항문에 바른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동의보감, 본초강목, 규합총서
이 대표의 고향은 거제도다. 제과제빵기술자 생활도 주로 부산에서 해왔다. 양산은 3년 전 빵집을 준비하면서부터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거창한 말은 저에게는 아직 어울리지 않아요. 그저 지금 살아가고 장사를 하고 있는 지역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겠다는 거죠. 경제적인 부분이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든 말이죠” 하루 지난 빵 전량을 물금에 있는 양산종합사회복지관에 보내는 일은 지난해부터 꾸준히 해 온 일이다. 더불어 어르신들을 위해 좋은 일에 써달라며 매달 기부금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무궁애학원 미래직업재활원에서 진행하는 ‘특수학급 학생 직업현장실습 교육’에도 2년간 흔쾌히 참여하고 있다. 1년 동안 매주 빵집에서 직접 지적장애 학생에게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 이 같은 현장실습을 통해 익힌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특수학급 학생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의미 있는 활동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2명의 학생이 이덕수 제과점과 인연을 맺었어요. 이들이 배운 것 못지않게 저도 이 학생들을 통해 많이 배웠어요. 장애는 조금 느리지만 결코 불가능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기술을 가르치면 다른 기술자들에게 비해 익히는 속도가 더딘 것은 사실이지만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자주 봐왔어요. 편견을 버리고 장애를 부담없이 바라볼 수 있는 너그러움을 배운 셈이죠” 이 대표는 장애학생들과의 인연 때문인지 지난해에는 장애학교인 양산희망학교 학생들의 제과제빵대회 지도도 맡고 있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재료 제공부터 기술 지도와 대회 안내까지 이들에게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엄아현 기자
식용유지가 들어간 미끌거리고 느끼한 크림 케이크뿐이었던 우리나라에 ‘순 우유 생크림 케이크’를 처음 소개해 빵을 좋아하는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크라운 베이커리. 더불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과점 프랜차이즈를 시작한 크라운베이커리가 25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이렇게 대형업체인 빵가게도 더 큰 업체의 위세에 눌려 문을 닫는 마당에 동네 빵집은 오죽하랴?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오로지 맛과 정직함으로 승부하는 우리 동네 빵집이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당히 프랜차이즈 제과점 옆에 문을 열어 맞짱 한 번 제대로 붙고 있는 빵집이 있다. 물금읍 범어리의 이덕수 과자점이 그 주인공이다. 프랜차이즈 옆에 빵집 열어 “고객 빼앗기지 말고 빼앗자” 3년 전 이덕수 대표는 빵집을 준비하며 큰 고민에 빠졌다. 20년 넘게 제과제빵기술자로 살며 대한민국 제과기능장 타이틀까지 가진 이 대표였지만, 먼저 빵집을 차린 선배와 친구의 얘기에 걱정이 앞섰다. 제과제빵기술자 빵집 옆에는 1~2년 이내에 반드시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들어선다고. 2년여 동안 겨우 만들어 놓은 상권을 고스란히 빼앗겨 매출이 떨어지고, 자금악화로 다양한 상품을 만들지 못해 경쟁력도 하락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표는 결심했다. “내가 프랜차이즈 옆으로 가자. 빼앗기지 말고 빼앗자”고. 프랜차이즈가 입점해 있는 수많은 장소를 물색하며 매출은 얼마이고, 배송은 언제 얼마나 어떻게 이뤄지는지 꼼꼼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차 안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물금읍 범어리의 지금 위치를 보며 ‘딱 여기다!’ 싶었어요. 신도시에 젊은 부부들도 많아 맛은 물론 건강도 생각하는 고객을 잡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100% 우리밀로 만드는 아이들 과자에 인공보존제와 유화제를 전혀 쓰지 않는 건강빵, 무엇보다 빵맛에는 자신있었으니까요” 이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고객들이 제과기능장이 직접 만든 수제베이커리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젊은 부부와 건강을 생각하는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년의 노력으로 일군 제과제빵기술과 경영자로서의 판단력이 조화를 이뤄 인기 빵집으로 입소문 나기 시작했다. 인공보존료ㆍ유화제 전혀 쓰지 않아 우리 밀 고집, 팥도 직접 끊여 사용 이덕수 제과점의 소문은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를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누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입방정을 떨었나. 기자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제과제빵 기술과 이 대표만의 경영노하우는 고객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 대표는 빵을 만드는데 어떠한 인공보존료나 유화제를 쓰지 않는다. 자연히 빵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가 작아 반죽에 더 큰 공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건강은 물론 그 담백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원칙을 절대 고수하고 있다. 또 아이들이 즐겨 먹는 과자류는 100% 우리 밀만 사용하고 있다. 이 외에도 유기농 빵 등 30~40%의 제품을 우리밀로 만들어 내고 있는데, 내년에는 밀 계약재배를 통해 점차적으로 전량 우리 밀만 쓰겠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뿐만 아니다. 팥빵 등에 들어가는 팥도 국산 팥을 사서 직접 끊여 사용하고 있다. 마가린은 절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버터로만 빵을 만든다. 케잌에 들어가는 과일 역시 통조림 과일은 일절 없다. 제철 과일을 현지에서 공수해 와 케잌는 물론 쨈까지 직접 만들고 있다. “왜 이렇게 까다롭게 하냐는 핀잔도 듣지만, 빵맛이 좋아질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요즘은 빵 종류도 다양하고 먹기 아까울 만큼 디자인에 신경 쓴 빵도 많아요. 하지만 역시 빵은 ‘맛’이 있어야 진정한 ‘빵’으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해요.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정직하게 사용한 빵은 맛이 절대 배신하는 일이 없거든요” 빵맛을 지키기 위해 이 대표가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철칙이 또 하나 있다. 그날 만든 빵만 판다는 것. 남은 빵은 양산종합사회복지관에 전량 기증하고 있다. “며칠 지난 빵도 먹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죠. 하지만 고객은 가게에서 빵을 사가면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두고 드시는데 그 맛이 그날 만든 빵만 하겠어요? 하루라도 더 빵맛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대한 좋은 빵만 판매하고 싶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빵이 맛있다’는 말인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 ‘빵이 맛없다’는 말이거든요. 하하” 제과기능장에 각종 경연대회 입상 “빵맛에 대한 자신감 없으면 안 돼” 이 대표는 대한민국에서 내 빵이 가장 맛있다는 자신감과 고집이 없다면 빵집을 차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물론 그런 자신감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연구와 노력은 물론 냉정한 평가와 실패를 경험해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다. 빵집 내부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상장이 이 대표의 말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었다. 서울국제빵과자경진대회, 미국캘리포니아레진콘테스트, 미국유제품베이커리경연대회, 호두제품경연대회, 크림치즈제품경연대회 등 각종 대회에서 상위 입상을 거머쥔 상장들이다. 제과기능장 자격을 딴 2006년을 제외하고는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매해 수상을 한 셈이다. “내가 만든 빵을 명장, 맛칼럼리스트 등 전문가에게 평가받고 실력을 견줘볼 수 있는 각종 대회는 제빵기술자들에게 꼭 필요한 경험인 것 같아요. 경쟁력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해야만 하잖아요. 이제는 대한민국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제과명장’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제과제빵기술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계단이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으로 가고 싶다는 허영심을 버렸으면 해요. 빵은 너무나 정직해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맛있는 빵이 만들어지지 않아요. 요즘은 많은 대학에서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현장을 경험하며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곳이 많은데 조금 힘들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해 버리죠. 직업에 대한 자부심, 빵맛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으면 해요” 문의 363-0907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뉴델리에서 근무하는 동안 아리랑, 쓰리랑이 인도에서 기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보았다. 인도에는 쓰리람이라는 큰 회사 이름도 있고 아리람이라는 사원들도 곳곳에 있다. 타밀나두주 첸나이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출장 온 기업인을 만나러 한국식당 아리랑에 갈 때 우리 운전사가 한국어로 아리랑이 무슨 뜻이냐고 내게 물었다. 왜 묻느냐고 하니까 첸나이에는 아리랑으로 부르는 템플이 많이 있다면서 자기가 가는 절 이름도 아리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왜 한국인 식당이 사원이름을 사용하는가 하고 의아해 했다. 그 후부터 아리랑, 쓰리랑에 대해서 관련 책과 인터넷 등을 뒤져보고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 많은 학설이 있어서 놀랐다. 그만큼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도 제대로 근원을 밝히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비록 학술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견해 중 하나일지라도 아리람, 쓰리람의 사례가 인도어에 있다는 것을 흥미 차원에서라도 살펴보자. 우선 인도어의 아리, 쓰리의 어원을 살펴보자. Arya라는 용어는 1853년에 막스 뮐러가 ‘아리안 인종’이라는 가설에 의거해 도입했으나, 1888년에 이를 번복해 혈통이나 피부색을 말하는 인종개념이 아니고 단지 아리안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막스 뮐러는 아리아의 어원을 농사와 경작을 의미하는 ‘아ㄹ(ar)’로 본다. 이렇게 보면 아리안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유목민이라는 주장 보다는 농경을 하는 정착민이라는 주장도 가능해 진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에 의하면 아리아는 훌륭한, 존경하는 의미를 가지고 나아가서 선생님, 아버지, 법, 부처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베다 문학에서는 ‘아리아’가 인종이나 언어와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신사ㆍ선량ㆍ올바른 사람ㆍ귀한 사람의 뜻으로 사용됐고, 흔히 Aryap utra, Aryakanya처럼 사람의 이름 앞에 붙여서 Sir 또는 Shree처럼 사용됐다. 발미키가 지은 라마야나에서 라마(Rama)는 아리야(Arya)로 묘사된다. 아리안은 기원전 1500년 께 인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리그베다에 그들의 생활상이 묘사돼 있다. 그들은 주로 펀잡 지역에 거주하며 공통의 언어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를 아리아(arya)라고 지칭했다. 그들은 다사(Dasa 또는 Dasyu) 라고 불리우는 집단과 지속적인 전쟁상태에 있었으나 결국은 아리안이 승리했다. 그 후부터 Dasa 는 노예의 뜻을, arya 는 ‘존경하는’ ‘고귀한’의 뜻을 가지게 됐다. 힌디 단어 aryavarta와 팔리어 단어 ariyam ayatanam은 ‘아리안이 사는 나라’라는 뜻이다. 타밀 문학에서는 북인도의 왕들을 Aryan kings 으로 불렀다. ‘쓰리’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것은 Sri raja 를 Maha raja 라고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maha는 ‘위대한’ 혹은 ‘커다란’의 뜻이고, raja는 왕을 의미한다. 따라서 sri는 요즈음 이름 앞에 붙이는 Mr.라는 뜻 외에도 전에는 ‘존경하는’ ‘위대한’ ‘커다란’이란 뜻으로 왕과 같이 높은 사람 앞에 붙이는 접두어였다. 스리랑카는 타밀어로 Sri(위대한)+ilangai(강 또는 섬의 뜻)에서 나온 단어라고 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아리’=‘스리’ = ‘존경하는, 고귀한, 위대한, 훌륭한’=‘높은 지위의 사람이나 신의 이름 앞에 붙이는 접두어’ 라고 말할 수 있다. 타밀나두 여기저기에는 ‘아리람’이라는 사원이 많이 있다. 여기의 ‘아리’도 ‘쓰리’처럼 ‘위대한’ 또는 ‘존경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존칭이므로 훌륭한 사람이나 신의 이름 앞에 붙인다는 점에서 같은 역할을 한다. 아리람의 ‘람’은 ‘라마’, ‘람’ 신을 뜻한다. 결국 아리+람은 위대한+라마신 또는 존경하는 + 람의 뜻이며, 쓰리람 역시 존경하는 라마신, 위대한 람이라는 뜻이다. 인도인들의 위대한 신 ‘람’을 모시는 사원 이름이 아리람 스리람이다. 따라서 ‘라마(람)’ 신 앞에 ‘아리’ 와 ‘쓰리’를 붙이면 ‘아리 람’ ‘쓰리 람’이 되는 것이다. 아리람, 쓰리람은 북인도보다는 남인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남인도 타밀나두 지역에는 여행지로 아주 유명한 ‘스리랑감’ 템플이 있다 뒤에 붙은 ‘감’은 접미사 ‘am’으로서 타밀어의 지명 뒤에 흔히 붙는다. 그리고 앞의 ‘쓰리’는 존경하는 사람 앞에 붙이는 존칭이다. 영어로 Mr.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 보다는 좀더 존칭의 어감이 강하다. 따라서 쓰리랑감 템플은 존경하는 라마 신의 사원을 뜻한다. 북인도의 아요디야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원래 힌두교의 성지였는데 이슬람세력이 들어왔을 때 힌두사원을 부수고 무슬림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1992년에 힌두들이 아요디야를 탈환한다고 하여 무슬림들과 큰 충돌을 빚어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 힌두들은 이 아요디아를 스리 람(Shri Ram)의 탄생 장소라고 해 아주 중요한 성지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가야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이 아유타국 출신 공주라고 하는데, 아유타 국이 바로 아요디야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람’만 신이 아니라 아리(ari), 스리(Sri)도 신의 뜻을 갖는 사례가 있다. 불교에서는 sri를 그대로 ‘부의 신’으로 보는데, 힌두교도들은 sri를 락스미(부의 신)로 본다. 여기서 hari는 산스크리트어이고 타밀어에서는 h가 탈락하여 ari가 된다. 아리와 스리 자체가 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리’자체가 ‘신’을 의미한다면 우리나라 불교에서 ‘수리 수리 마하수리’라는 말은 ‘스리신님 스리신님 위대한 스리신님’ 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마하’는 ‘커다란, 위대한’의 뜻이다. 지금까지 인도어에서 아리람, 쓰리람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국어의 아리랑, 쓰리랑과의 연결고리는 거의 찾지 못하였다. 단지 아리 와 스리가 ‘신(神)’의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아리랑, 스리랑과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았다. 우리나라의 ‘아리랑 쓰리랑’의 어원을 찾아보던 중 우리말과 인도어를 연결시킬 만한 실마리 하나는 바로 조선시대의 부적이었다. 부적은 가운데에 한자로 ‘牛痘神’ 이라고 세로로 써 있고, 좌측 세로에 한글로 ‘마마귀신’, 우측 세로에 ‘아라리랑’이라고 써져 있었다. 우리의 ‘아리랑’이 ‘신’과 관련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아리람, 쓰리람이 신의 뜻을 가진 것처럼 한국의 아리랑이 신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양쪽을 연결시킬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생각된다. 또 하나 현재 근거는 찾지 못하였지만 인도어의 ‘뿌자’(pooja)는 우리로는 일종의 ‘고사’지내는 의식을 말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문양들이 우리의 ‘부적’으로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부적을 인도의 관련 문양과 연결지어 공부해 본다면 좋을 것이다.
영남알프스의 시작인 울주 가지산 줄기에서 발원해 밀양댐으로 흘러들어가는 이천천은 울주 배내골과 양산 배내골을 아우르는 맑은 물과 아름다운 계곡으로 오랫동안 인근 피서객들의 낙원으로 존재했다. 특히 장선마을 앞 송림 주변은 시원한 그늘과 시냇물이 조화를 이뤄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에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였다. 1980년대까지 이곳은 차량의 접근과 통행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원동면소재지에 있는 역에서부터 배내골까지 하루 두 차례 미니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 와서의 일이다. 원래 배내골은 임진왜란을 피해 숨어들어온 사람들의 후손이라 할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해방이 되자 빨치산 총본부가 이곳에 설치돼 좌파들의 준동이 끊일 날이 없었고, 이에 대응한 서북청년단에 의해서 온 마을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원동면으로 가려고 해도 험난한 배태고개가 떡 버티고 있어 낭떠러지 같은 산길을 쉬 내려갈 수 없었다. 일제 말엽부터 이곳에 산판이 조성돼 벌목작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면서 미군 GMC트럭을 개조해 목재운반에 나섰다고 한다. 원동역으로 이어지는 차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차량의 통행은 어려워 주민들의 불편은 계속됐다. 그러던 중 1971년인가 동면 출신 육군참모총장 서종철 장군이 군사작전도로 개설사업을 추진해 배태고개를 통과하는 도로확장사업을 준공했다. 이후 차량의 통행이 수월하게 되고 1977년부터는 마을버스가 운행하게 됐다. 자연은 본시 개발되지 않은 상태가 가장 수려한 모습을 간직한다고 했던가. 길이 좁고 험해 차량의 통행이 어렵던 그 시절 배내골은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천혜의 피서명소였다. 승차인원이 20명도 채 안 되는 승합미니버스에 꽉 들어찬 주민들과 피서객들은 배태고개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버스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산천을 바라보며 자연을 즐기기도 했다. 해마다 늘어나는 피서인파로 인해 1987년에는 이곳을 자연발생유원지로 지정했고, 대리 입구에서부터 입장료를 받아 피서객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를 치우는데 쓰기도 했다. 물론 이 일은 마을 청년회가 주축이 돼 해마다 큰 고생을 했다. 배내골 지형이 바뀌게 된 것은 밀양댐 건설부터였다. 1991년 시작된 밀양댐 건설공사는 수자원공사가 주관했다. 밀양, 창녕, 양산 주민들에게 양질의 식수를 제공하기 위해 추진된 역사(役事)였다. 10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01년 11월에 완공했다. 밀양댐을 막고 나서 수질보호를 위해 2000년 11월 10일부로 상수원보호구역이 지정됐다. 그해 6월 양산8경 중 하나로 지정된 직후의 일이었다. 배내골이 양산시민에게 실체적으로 더 가까워지게 된 것은 지방도 1051호의 개설 덕분이다. 1051지방도는 원래 어곡동과 배내골 간 도로였는데 밀양댐 건설과 함께 밀양시 단장면까지 연장했다. 어곡동과 원동면, 상북면 경계 부근에 자리한 에덴밸리 리조트 건설이 추진되면서 어곡~배내 구간의 지방도 확장공사가 진행됐다. 리조트 내 골프장 개발업체인 (주)신세계개발이 2004년 공사를 시작해 2007년 개통했다. 이 도로는 신불산공원묘원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바람에 공포괴담이 나오기도 했지만 실제로 급경사와 계속되는 비탈로 인해 대형사고가 빈발해 ‘죽음의 도로’로 불려지기까지 했다. 경찰의 대형차량 통행제한조치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단체여행버스와 기업체 단체관광버스가 추락하는 대형사고가 잇따랐다. 하지만 양산에서 원동면을 돌아가는 먼길을 피해 배내골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는 지름길이 개통돼 배내골은 이제 가까운 피서지가 됐다. 더불어 국가지원지방도 69호선이 추진돼 울주 석남사 입구부터 배내골을 따라 원동면 신리삼거리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개통되면서 순식간에 배내골은 부산, 울산 등 대도시 주민들의 나들이 드라이브길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교통이 편리해진 배내골에서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작목이 눈길을 끌었다. 매년 2월 고로쇠 축제를 비롯해 11월에는 배내골 사과축제가 그것이다. 물론 원동면 지역에서 봄에 열리는 매화축제도 배내골로 이끄는 요인이 되곤 한다. 아주 오랜 옛날, 변란을 피해 이곳에 온 사람들의 후손이 일궈놓은 산골마을 배내골은 오랜 세월 동안 양산의 허파 노릇을 톡톡히 했다. 청정자연의 대명사로 도시 인근에 위치한 관광명소였던 것이다. 지금도 원동면 일대의 원동역사와 매화축제, 천태산 등산과 더불어 양산8경으로서의 명성을 간직하고 있는 배내골이야말로 우리 양산이 자랑하는 천혜의 관광자원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댐 건설 이후 물에 들어가 노니는 행위는 위축됐지만 주변 지역에 넓게 자리한 펜션가는 짐짓 유럽의 어느 휴양도시에 와 있는 착각에 들게도 한다. 아직까지도 도시의 오염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 배내골이 자손대대로 청정자연을 보존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겠다.
잉어와 붕어의 영양성분은 거의 흡사하다. 지질은 3.4%로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대부분이 불포화 지방산으로 돼 있으며 단백질 함량이 높고 칼륨, 철 등의 미네랄과 비타민 A, B1, B2 가 다량 함유돼 있다. 히스티딘, 글리신과 같은 아미노산도 많이 함유돼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고도의 영양소가 성인병이나 특히 산후 산모의 젖을 나오게 하는 분비촉진제로서 우리나라에서 약용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붕어의 단백질은 소화 흡수가 잘 되는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때문에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등 혈관질환을 앓는 사람에게 좋다. 산성식품이기는 하나 칼슘과 철분의 함량이 많아 발육기 어린이나 빈혈인 사람에게도 좋다. ■ 잉어의 효능 동의보감에서 잉어는 맛이 달며 독은 없는데, 주로 황달, 소갈을 치료하고 수종병(몸이 붓는 증세), 각만(다리가 붓는 증세) 등에 쓰인다. 특히 임산부가 몸이 붓는 증세를 치료하고 안태시킨다 하여 오래 전부터 한의학에서 임산부를 위한 약으로 쓰였다. 또한, 조선 최고의 육아서로 알려진 태교신기에서도 ‘자식이 단정하려면 잉어를 먹으라’, 중국의 본초강목도 ‘잉어는 부종을 내리게 하고 소변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산모들의 모유를 풍부하게 산모들이 출산을 하고나면 잉어를 고아서 먹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잉어가 모유 촉진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원기회복 잉어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비타민과 단백질, 칼륨, 철분, 미네랄 등이 원기회복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기운이나 체력이 떨어졌을 때 잉어즙을 꾸준히 먹으면 원기회복에 효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혈액순환 잉어즙을 먹으면 혈중 콜레스테롤을 배출시키고 혈관을 깨끗하게 만들어 혈액순환이 원활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각종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붓기 제거 몸안의 어혈을 풀어주는 잉어효능은 혈액순환을 도와 붓기를 제거해주는 효과가 있다. 해독작용 잉어효능에는 간의 열을 다스려주는 성분이 있다. 특히 잉어 쓸개에 간을 해독하는 성분들이 풍부하여 과음 후 술독을 풀어주고 간의 생기를 회복하게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근육이 위축되고 마르며 수척해 보일 때 근육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 잉어의 효능 중 하나이다. 이외에도 당뇨병 개선이나 고혈압 및 동맥경화 예방, 수족냉증 치료, 간 해독, 부종제거 등에 잉어즙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 붕어의 효능 빈혈치료 및 성장촉진 우리 몸에 철분이 부족해지면 현기증이나 빈혈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붕어에는 철분과 칼슘이 풍부하기 때문에 현기증 및 빈혈치료에 도움이 된다. 또한, 칼슘과 함께 각종 영양성분들이 골고루 들어 있어 성장기 어린이들의 성장을 도와주고 뼈를 튼튼하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 숙취해소 및 위장보호 술을 마시기 전이나 후에 붕어즙을 마셔주면 숙취해소에 도움이 되는데, 붕어는 간세포의 재생을 도와주기 때문에 숙취해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또한, 풍부하게 함유된 단백질이 위의 기능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에 붕어즙을 꾸준히 마셔주면 위 보호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붕어즙 효능 중에는 남성들의 정력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스트레스 해소 및 설사 개선붕어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단백질이 위 보호 뿐만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을 없애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되며, 설사 증상이 있다거나 음식을 먹고서 체했을 경우에도 붕어즙을 마셔주면 치료에 도움이 된다. 또한, 비위를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어 구토를 진정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 붕어의 처방 복수증과 만성신장염 등 몸이 붓는 병 이런 경우 비교적 큰붕어의 내장을 꺼낸 뒤 참기름, 생강, 팥, 땅콩 등과 함께 푹 끓여서 즙을 내어 먹는다. 토혈 붕어를 씻어서 비늘을 긁어버리고 회를 친 다음 식초를 적당하게 넣고 실컷 먹는다. 또는 불에 태워서 가루 내어 한 번에 3∼4g씩 하루 2번 차 달인 물로 빈속에 먹는다. 여자의 하혈 붕어 큰 것 한 마리를 내장을 제거하고 혈갈 12g, 유향 12g을 젖은 솜으로 싸서 잿불에 구워 검게 태워서 잿가루를 만들고 이것을 매일 세 차례 식전마다 따끈한 물로 12g씩 복용하면 매우 효험이 있다. 당뇨병 붕어찜을 만들어 자주 먹으면 좋다. 또는 큰 붕어의 내장을 빼내고 그 속에 차잎을 채워 넣은 다음 물에 적신 문 종이로 싸서 불에 구워 먹는다.(1일 붕어 3마리씩 1개월 복용) 춘곤증 붕어 백숙을 해먹는다. 방법은 붕어는 비늘은 손대지 않고 내장만 깨끗이 제거한다. 질그릇(또는 압력솥)에 1의 붕어, 생더덕, 수삼, 대추, 생강, 마늘을 넣고, 물을 충분히 부어 센불에 2시간쯤 끓인다. 체에 걸러서 국물만 담는다. 국물에 참기름, 후추, 소금으로 간을 하여 먹는다. 상기의 각종 처방에 사용되는 각종 식재료와는 궁합이 잘 맞는 식재료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볼 수 있다. ■ 잉어, 붕어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식품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피하는 것이 좋으며 서로 상극인 식품으로는 약재로 쓰이는 천문동 이나 주사와는 서로 맞지 않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팥이나 땅콩과는 잘 어울리지만 녹두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닭고기와는 잘 맞지만 꿩고기 또는 개고기, 돼지간과는 잘 맞지 않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참고문헌: 동의보감, 증보산림경제, 규합총서
이름은 분명 ‘편의점’이다. 하지만 밤 12시가 되면 불이 꺼지고 문이 닫힌다. ‘모닝’이란 이름처럼 아침이 되면 다시 문이 열린다. 북정동 네오파트 아파트 근처에 위치한 ‘모닝 편의점’이란 조그만 가게의 이야기다. 모닝 편의점은 동네 가게다. 과자를 팔고 음료를 판다. 담배도 판다. 여느 동네 가게와 다를 바 없다. 조금 특별하다면 스포츠 토토를 판매한다는 점. 최근 가게 위치를 옮기며 25평으로 면적도 넓어졌으니 이제 ‘구멍가게’는 벗어났다고 봐야할까? 아무튼 그렇게 동네 가게로 모닝 편의점은 1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 모닝 편의점은 사실 특별할 게 없다. 그런데 그래서 특별해 보인다. 흔히 ‘편의점 전쟁’이라 부르는 시대가 아닌가. 대기업 상호를 단 체인형 편의점이 골목 점령을 넘어 같은 브랜드끼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대형 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까지 등장. ‘동네 가게’는 하나 둘 골목에서조차 밀려나고 있다. 모닝 편의점이 위치한 북정동 역시 치열한 경쟁은 마찬가지다. SSM에 편의점도 속속 늘고 있다. 2004년 1월. IMF 여파로 직장을 그만둔 이석현(47) 씨와 당시 자동차 보험 설계사를 했던 김수자(46) 씨 부부가 가게를 시작한 건 김 씨 친언니의 권유때문이다. 적성에 맞고 단골 늘어 매출 오름세 “사실 아이들을 좋아해서 보육교사를 해볼까 생각했어요. 모 대학교 보육교사과정에 등록까지 마친 상태였죠. 그런데 친언니가 슈퍼마켓을 해 볼 생각이 없냐고 추천하더군요. 돌아다니는 일보다 한 자리에 머물러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에 맞을 것 같더군요. 당시 주변에 슈퍼가 별로 없었으니 그 점도 좋았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보육 일을 배우기 위해 수업료까지 납부한 상태에서 언니의 추천에 노선을 급히 바꾼 김수자 씨. 자기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마치고 보증금 5천만원과 물품구입비 약 3천만원을 들여 가게를 열었다. 도로변이란 나쁘지 않은 위치와 주변에 아파트 단지도 있다. 게다가 일도 자신의 성격과 맞다보니 큰 어려움 없이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단골도 많아졌다. 통도사 부근에서 일부러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다만 남편은 아직도 일이 성격이 맞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며 김 씨는 웃어 보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가게들이 한두 개 생기기 시작했다. 대기업 간판을 달고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도 생겼고, 덩치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SSM까지 등장했다. 4곳의 크고 작은 마트, 9곳의 슈퍼마켓과 편의점. 김 씨의 가게가 위치한 북정동에도 치열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씨는 자신 있었다. 10년 간 지켜온 경력이 있었고, 단골이 있었기 때문이다. “4~5년 전부터 가게들이 참 많이 늘어났지요. 대형마트도 들어서고요. 하지만 솔직히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어요. 그동안 자리를 지켜온 만큼 단골도 많았고, 크게 성공하지는 못해도 먹고 살만큼 벌 자신은 있었죠” 6개월 전 위치 옮긴 후 매출 급감 그러던 김 씨는 6개월 전 현재 위치로 가게를 옮겨야 했다. 건물 주인이 예전 자리에 빵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옮겨온 곳이 불과 예전 자리와 5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타격은 컸다. 매출이 20~30%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간혹 ‘언제 이쪽으로 옮겼느냐’, ‘가게가 없어져서 다른 일 시작한 줄 알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잘 나갈(?) 당시 권리금으로 1억원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가게를 팔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람 일이란 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지만 김 씨는 매출이 떨어져도 당분간 가게를 팔거나 할 생각이 없다. “이 동네에서 10년이나 장사를 해 온 저도 힘든데 이제 (가게를 시작한지) 1~2년 된 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분들 생각하면 말이에요” 매출이 20~30%나 줄어들었다. 분명 힘든 시기일 텐데 김 씨는 힘들다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쟁업체들을 걱정하며 욕심을 계속 버리고 있다. 가게를 찾는 이런저런 손님들의 힘든 이야기를 듣다보니 마음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가게를 오래하다 보니 사람들, 특히 단골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게 돼요. 대부분 저는 듣는 입장이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참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고요.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절로 욕심을 버리게 돼요. 속으로 ‘그래도 난 복 받은 거구나. 저 분들에 비해 난 잘 살고 있구나. 욕심내지 말고 살아야지’하는 생각을 하는거죠” ‘동네장사’ 10년. 급변해버린 동네 모습이 때론 낯설기도 하고, 옛날 잘 나가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이제 단골이랍시고 외상은 물론 ‘한 잔 하려는데 돈이 없다’며 돈까지 빌려달라는 손님들도 있다. 그래도 김 씨는 ‘허허’하고 웃는다. 김 씨에게는 그런 일도 동네장사 10년의 ‘에피소드’일 뿐. 가게를 찾은 손님들의 마음에 ‘평안’이 함께하기를 바란다며 가게 입구에 ‘평안수’ 화분을 갖다놓은 김 씨. 김 씨는 욕심을 버린 자신의 마음처럼 ‘모닝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의 내일도 ‘굿모닝’이길 기대하며 오늘도 가게 문을 닫는다.
민(fish)-물고기, 악시(eye)-눈 마두라이에는 남인도에서 가장 큰 미낙시(민+악시) 사원이 있는데 물고기라는 뜻의 ‘민’과 눈이라는 뜻의 ‘악시’를 합쳐서 미낙시, 즉, ‘물고기눈’ 사원을 의미한다. 최인석 씨는 2009년 5월 18일에 인도코리아 싸이트에 올린 글에서, 우리말에서 민물고기라고 말할 때의 ‘민’이 반복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리했는데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미낙시 템플의 다른 이름은 까얄깐니 즉, 물고기 까얄(kayal=fish) + 눈 깐니(kanni=eye)이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까얄은 우리나라의 고대 가야국과 대응되며, 특히 물고기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가야의 두 마리 물고기 문장은 수로왕릉에 가보면 누구나 볼 수 있는데 인도 타밀나두주 남부에 있던 빤디야 왕국의 문장 역시 물고기였다. 다른 점은 두 마리가 아니고 한 마리라는 점이다. 한양대 김병모 교수가 밝힌 쌍어문장은 아요디아가 있는 북인도 우따르쁘라데시의 문장이었다고 한다. 이빨에 대해 우리말 이(tooth)는 타밀어 빨. 우리말 잇몸(gum)은 타밀어 이(이ㄹ). 따라서 우리말 ‘잇몸+이’를 타밀어로 ‘이ㄹ+빨’로 보자. 즉, 타밀어의 ‘이ㄹ+빨’ 은 현재 우리말의 ‘잇몸+이빨’의 뜻이다. 우리말의 ‘이빨’은 현재 tooth만을 의미하지만 옛날에는 ‘이’와 ‘잇몸’을 합친 의미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옳다면 타밀어가 우리말보다 먼저 탄생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빨’은 빠져나온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어떤 무리에서 꺼내는 것을 ‘뺀’다고 한다. ‘빠지다’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을 유추할 수 있다. ‘허리, 혀’에 대해 우리말 ‘허리’는 타밀어로 ‘아라이(arai)’라고 한다. 그런데 남인도의 하층민들에게 ‘아’ 발음을 시켜보면 ‘하’에 가깝게 발음한다. 그러므로 ‘아라이’는 거의 ‘하라이’로 발음된다. 하라이는 또 ‘절반’이라는 뜻도 가진다. 따라서 허리와 하라이는 의미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같은 단어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우리말 ‘혀’는 타밀어로 ‘나-’인데 타밀어는 ‘n’이 ‘y’로 변하는 현상이 있으므로 ‘야-’로 발음된다. ‘n’이 ‘y’로 변하는 현상을 살펴보자. 우리말 ‘나’는 타밀어 ‘난’ 인데, 우리말 ‘나의’는 타밀어 ‘난우다야’가 ‘옌우다야’로 변하는 등 여러 예를 볼 수 있다. 여기에 ‘아’ 가 ‘하’로 발음되는 현상을 적용하면 타밀어 ‘나 = 야 = 햐’ 가 되며 우리말 ‘혀’와 대응된다. 즉, 우리말 ‘혀’는 타밀어 ‘나’와 일치하게 된다. 신체, 일상생활과 관련한 기초 어휘 우리말 나(I)는 타밀어 난 우리말 너(you)는 타밀어 니 우리말 날(day)은 타밀어도 똑같이 ‘날’ 우리말 물(mur)은 타밀어 마리mari (water) 우리말 숨(쉬다)은 말라얄람어 수마, 타밀어 수마뿌 우리말 보따리는 타밀어 뽀따람(작은 보따리), 뽀디(큰 보따리) 우리말 벌레는 타밀어 뿔루 우리말 바람은 타밀어 바람, 와람(valam) 우리말 빨리는 타밀어 발레, 왈레(valle) 힌디 우땀 - 으뜸 힌디 또끄리 - 소쿠리 힌디 만 - 마음 타밀 마남 - 마음 힌디 물리 - 무 힌디 살 - 살(한살, 두 살, 세 살...), 설 힌디 풀(phul) - 꽃(명사), 꽃을 풀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음 힌디 풀나(phulna) - 꽃이 피어나다(동사), 부풀다 힌디 펠나(phelna) - 퍼지다 타밀 풀(뿔:pul) - 풀(grass) 힌디 팔락(phalak) - 풀잎 힌디 아스 빠스 - 가까이, 근처에의 뜻이므로 ‘어슷비슷’과 연결가능 힌디 떼라 메라 - 꼬불 꼬불 힌디 우바르 카바르 - 울퉁 불퉁 힌디 자루 - 빗자루 힌디 까리 - 고리(link), 문고리 타밀 일(il,elu,ela) – 파도가 ‘일’다, 아침에 ‘일’어나다, 새로 생긴다는 뜻. 타밀 까루 - 가래(소가 끄는) 타밀 바땀 - 밭 타밀어 고, 세 - 우리말 소 우리말 소를 타밀어로 고, 세 라고 한다. 타밀어와 칸나다어는 같은 드라비다어인데 이들 언어는 g, k 가 c, s와 일률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말 소는 드라비다어 소(고)와 같다. 물 - 나 우리말 의 냇물, 시냇물 할 때 ‘내’는 타밀어로 니르(nir)라고 한다. 힌디에서도 na라는 어소는 물과 관련된 단어에서 볼 수 있는데 강은 나디, 소금은 나막, 도랑(물)은 날-라-, 보트는 네-야 또는 노-까라고 한다. ‘노를 저어라’ 할 때 ‘노’는 타밀고어에서는 ‘나와이’라고 한다. 나와이는 나룻배의 의미도 있다. 갈리 - 가늘고 긴 힌디 ‘갈리’는 우리말 길, 힌디 ‘웅갈리’는 우리말 손가락, 힌디로 ‘갈리갈리’는 여러갈래의 길을 뜻한다. 우리말 갈래갈래와 비슷하다. 가늘고 긴 형태를 ‘갈리’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카락, 떡가래 등도 그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옆 - 빠ㄹ(pa, par) 힌디로 남편은 빠띠, 부인은 빠뜨니, 가족은 빠리와르, 결혼은 빠리나이, 이웃은 빠로쓰, 새는 빠린다, 천사는 빠리, 날개는 빠ㄹ 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가까이 ‘옆’에 붙어있다는 의미나 ‘날개’를 뜻하는 힌디 단어에는 pa, par가 공통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몸 옆에 붙어있는 것이 ‘팔’이고, ‘파리(fly)’가 날개달린 것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숫자 : 끄로르와 꼬리 고대 한국어에서 3을 미르, 타밀은 3을 무르, 4를 날르, 100을 누르, 천만을 꼬르. 힌디로는 천만(10,000,000)을 끄로르(crore) 라고 하는데 타밀에서는 꼬리, 꼬르(codi : d는 발음은 r로)라고 한다. 아주 큰 수의 마지막 숫자라는 뜻에서 ‘꼬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말에서는 끝을 의미하는 ‘꼬리’로 남아 있다. 소리, 말,언어 우리말의 ‘말’(언어)을 타밀에서는 ‘몰리’, ‘말하다’는 ‘몰리달’이라고 한다. 힌디에서는 ‘소리’를 ‘쇼르’, 소리 ‘지르다’ 를 ‘질라나’, ‘부르다’를 ‘불라나’, ‘말하다’를 ‘볼나’, ‘울리다’를 ‘룰라나’라고 한다. 타밀-담로-탐라 이 부분은 우리나라의 고대 행정조직 담로, 제주도의 ‘탐라’와 인도 ‘타밀’(드라비다의 음운변화) 등이 연계되기도 하는데 이는 타밀어로 왕을 뜻하는 ‘고’ 와 제주도의 고, 양, 부를 함께 조사해 볼 필요도 있다.